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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의 사람과 사람 사이] 다시 사할린을 생각하는 까닭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3-09-19 11:16:37

안상호의 사람과 사람 사이, LA미주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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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은 겨울이 길고 날씨가 매섭다. 5월인데 한창 겨울이었다. 오리털 파카를 챙겨 오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한 겨울에는 영하 40 도까지 떨어진다고 한다. 장터에 좌판을 벌여 놓은 고려인 할머니들은 모두 두툼한 스웨터에 털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민 100주년 때던가, 사할린 동포사회를 취재 갔을 때의 기억이다. 

러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은 사할린 남부를 지배했다. 석탄과 광물, 목재 등 천연자연이 풍부한 이 섬은 전쟁 물자 조달에 중요했다. 하지만 일본인은 오지 않으려 했다. 환경이 워낙 척박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식민지 조선이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자원 모집형태로, 전쟁 막바지에는 대놓고 강제로 끌고 갔다. 이렇게 간 조선인 징용이 4만5,000에서 6만5,000명 정도. 사할린에서 만난 동포 대부분은 본토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90%가 경상도 출신이라고 했다. 목포나 군산 등 전라도 보다 경상도 지방에서 모아야 사할린으로 실어 나르기 쉬웠던 까닭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부는 일본 본토의 광산 등으로 다시 끌려 가면서 가족과 생이별했다. 종전 후 일본은 협상을 통해 사할린 거주 일본인들을 데려갔으나 조선인 징용과 후손들은 팽개쳐졌다. 나중에 일부는 북한으로 갔다. 한국은 나 몰라라 했다. 냉전 당시 한국은 힘이 없었다. 사할린이 갈가리 찢긴 이산의 섬이 된 데는 이런 역사가 있다.  

사할린에서는 50세 생일이 큰 잔치였다. 탄광과 산판 등의 노동이 워낙 힘들어 쉰 살 이상 사는 사람이 적었다. 그 땅에서 살아 남으려면 우선 억척스러워야 했다. 장에서 김치 장사를 시작했다. 산과 들에는 나물 거리가 지천이었다. 그 곳 사람들은 쳐다보지 않았다. 뜯어온 산나물을 무쳐 현지인에게 팔았다. 사할린 고사리는 시애틀 산 보다 통통했다. 

주도인 유즈노 사할린스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산길로 100킬로쯤 가면 홈스크에 닿는다. 소련 전투기에 의해 KAL기가 격추된 데서 멀지 않다. 바닷가 작은 장터에 좌판을 펴고 앉은 이들도 모두 고려인. 여기서도 해초, 산나물, 텃밭 야채 등을 거둬 팔았다. 구 소련 경제가 붕괴됐을 때 먹거리 공급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이미 사할린 주정부에 장관급 동포도 있었다. 남한 보다 약간 작다는 이 섬의 전기와 난방 등 에너지, 도로, 아파트, 상하수도 시설 등을 총괄하고 있었다. 사할린 한인회장이기도 했다. 러시아 연방하원인 두마에 출마할 계획이라고 말하던 것이 생각난다.

또 한 사람, 동포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히던 사할린 국립사범대학의 교수가 기억난다.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사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사할린 동포의 이중국적과 한국 자유왕래 등을 요구하며 동포들의 권익 신장에 앞장서던 학자다. 그는 4.29 폭동 뒤 LA도 방문해 폭동 원인 등을 분석한 보고서를 러시아 정부에 제출했다고 한다. 다민족 사회인 러시아 역시 늘 인종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당원’이었는지는 모른다. 당이 힘이 셀 때는 당원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살기 위한 유력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당원이 돼 봐야 누릴 것도, 나올 것도 없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 때는 공산당원 보다 러시아 마피아가 세던 때였다.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구한말 조선인 이주사를 연구한 박(이)혜옥 박사의 ‘아리랑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보면 19세기 말과 일제 강점기에 극동 러시아와 만주의 조선 이주민들은 초 국적 디아스포라를 이루고 있었다. 피폐해진 고향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멕시코 장벽 앞에 진을 친 중남미 난민은 그때 조선 유랑민의 모습과 닮아 있다. 조선인들이 더 참혹했던 것은 일본군, 청나라군, 러시아군에 징발돼 같은 민족끼리 싸우고,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유랑민이 된 주된 원인은 조선의 지배계급이던 황제와 고위 관료, 양반들의 무능과 부패, 비겁함 때문이었다. 난국은 권력자들이 자초하고, 가장 혹독한 고초는 민초들이 겪었다. 

사할린 한인과 이 논문이 생각난 것은 한국에서 논란이 된 홍범도 장군 때문이다. 어설프게 이런 논쟁에 말을 보태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홍 장군도 어쩔 수 없는 이주자, 이민자의 한 사람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달라졌다. 머슴, 의병, 포수, 농장원, 극장 경비원 등을 거치며 나라 밖에서 나라 찾는 일에 생애를 바친 한 이주자의 일부 시기를 평가하려면 국가와 후대의 공동체 구성원들은 사려 깊어야 한다. 턱없이 부족한 역사 지식과 안목, 자신의 경험이 갖는 한계를 모르는 무지, 단순 인과관계로 세상을 보는 단세포형 사고가 힘을 갖게 되면 세상이 쓸데없이 시끄러워진다. 어느 시대, 어느 집단에서나 마찬가지다.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는 이렇게 시작한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다. 그러나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이 말은 ‘돼지와 조선인만 산다’는 이카이노(돼지 키우는 들판)에 삶의 뿌리를 내렸던 재일동포의 이야기지만, 당시 국가가 지켜주지 못했던 한민족 디아스포라 모두의 삶을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다.                         <LA미주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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