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약속 시간을 번번이 어기는 친구가 있었다. 오 분, 십 분, 이십 분, 매번 기다리는 쪽은 언제나 나였지만, 그가 늦는 것 때문에 마음이 상했던 적은 없었다. 언제라도 돌발 상황이 생길 수 있는 직업을 가진 그의 형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친구의 도리라고 믿었다. 그랬다. 어느 날 그의 지각이 습관적이라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
삼십 분 넘게 그 친구를 기다렸던 날이 있었다. 처음엔 으레 조금 늦겠거니 했다가, 혹시 다른 장소로 잘못 안 견 아닐까 하다가, 사고가 난 것은 아닌가, 지금까지 반시간 이상 늦은 적은 없었기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촉각이 출입구 쪽으로만 향했다. 그때 한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지인 집에 놀러 왔던 그 친구가 나를 만나러 간다면서 조금 전에야 떠났다고 했다.
약속 시간이 삼십 분이나 지났는데 지금에야 자리를 떴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곧이어 친구의 문자가 도착했다. “지금 가는 중“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오지 마, 기다리다가 방금 나왔어. 이미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야.”라고 답을 보냈다. 지금까지 갑작스레 생긴 일 때문에 늦었다던 말은 모두 핑계였을까?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통 그를 걱정했던 내 마음이 순식간에 돌변해 버렸다.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배신감인지 모멸감인지, 코끝에 싸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혹시 누가 내 모습을 보는 건 아닌가 싶어 얼른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오로지 자기 둘만 사는 세상인 것처럼 찰싹 붙어 앉은 남녀 한 쌍, 쉬지 않고 수다를 풀고 있는 세 명의 아줌마들, 커피를 홀짝이며 핸드폰을 보는 긴 머리 여자. 모두 제각각의 모습으로 여유를 즐기는데, 나만 목을 길게 빼고 문 쪽만 바라보고 있었구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눈을 감고 카페에 흐르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자, 감정의 소용돌이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군소리 없이 매번 늦는 그를 기다려 준 내가 그의 행동에 길들여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야. 어쩌면 친구의 기분을 맞추려고 나 스스로 자세를 낮추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차라리 약속에 늦을 때마다 내 감정을 알려주었더라면, 내가 그 친구를 등지는 결과가 생기지 않았을까?
친구와의 경험이 때문인지, 어떤 약속에도 일찌감치 나가 기다리는 일은 내게 습관이 되었다. 차 한 잔 시켜놓고 기다리는 틈새에서 즐기는 느긋함도 좋지만, 바쁜 일상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은 것에서 얻는 만족감이 더 크다.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에 형광펜 밑줄을 그며 혼자 웃기도 하고, 가끔은 묵혀두었던 글 한 편을 꺼내 첨삭도 한다. 그러다 운 좋게 글감 하나 떠올리는 횡재라도 만나면 기분이 하늘을 날 것 같으니, 설령 상대가 조금 늦은들, 아니 바람을 맞힌들 뭐 딱히 속상해 할 일이 아니다.
프랑스 속담에 “사람은 자기를 기다리게 하는 사람의 결점을 계산한다.”라는 말이 있다. 맞다. 사는 동안 약속 시간 하나만 잘 지켜도 상대방이 나로 인해 실망하는 일은 없을 테고, 그뿐이랴. 약속만 잘 지키면 인간관계에서 우정이든 사업이든 최상의 신용등급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 일석이조 아니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