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지나칠 만큼 절약생활에 투철했던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운전 중 네거리의 신호등이 보이기 시작하면 멀리서부터 엑셀레이더에서 발을 떼고 서행 모드에 들어갔다. 이유는 브레이크 마모를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80년대 초만 해도 자동차 숫자기 많지 않은데다 도로가 반듯한 로스앤젤레스였으니 가능했지 지금 뉴저지에서 그랬다가는 당장 자살특공대로 고발되었을 것이다
서부에서 운송해 온 자동차가 아직 그럴 때가 아니었는데 브레이크 장치를 바꾸라고 한다. 의아해서 물어보니 혹시 경사 진 길을 자주 운전하지 않느냐고 해 ‘아, 그래서 그랬 구나’ 하고 수긍을 했다. 텃밭에 가는 5 마일은 계속 오르막길이고 올 때는 그 반대로 내리막길인데 내려 갈 때의 힘은 엑셀레이더가 아니라 순전히 브레이크 페달에 의존하는 이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딸과 사위는 내리막길의 운전이 위험하니 눈, 비 올 때나 해가 졌을 때는 운전하지 말라 고 신신 당부한다. 운전이 아니라 등산에서도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래서 등산가들에게 오를 때는 체력의 절반 이하만 쓰고 나머지는 비축으로 남겨두라는 수칙이 있다. 또한 등산 사고의 60%가 올라 갈 때가 아니라 내려갈 때라는 통계도 있다.
방송 현업을 할 때다. 해마다 연말이 다가오면 미리 ‘올해의 10대 뉴스’ 를 정해 놓고 취재에 들어갔다. 그런데 12월에 들어서면 생각 못했던 대형사건, 사고가 터져 순서를 다시 편성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한 해의 내리막길에 들어선 12월에는 잠시라도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면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쉽다.
일본의 소설가 겸 평론가 이쯔키 히로유키가 쓴 ‘하산(下山)의 사상(思想)’이라는 수필집이 있었다. 이 책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이 그 지위에서 밀려나 있을 때 국가의 운명에도 하산길이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안전하게 내리막길을 밟아가자는 자성의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정권교체시기가 한 달 남짓 남았다. 패배의 아픔이야 크겠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겸손하게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임기 말에 옹졸함이나 노추(老醜)의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한다. 지난 시절 자유와 인권, 복지와 반전(反戰)으로 약자와 서민들을 열광시켰던 민주당이 오늘 왜 이렇게 왜소해졌는가를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국민의 마음을 버리고 이기는 정치인은 없다.
내리막길로만 가던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은 느닷없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온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대명천지에 자기 부인의 죄를 덮고 무능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헌정파괴를 자행하다니, 이는 자기 국민을 향한 자폭테러나 다름없었다.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인 걸 왜 몰랐을까.
좁은 산길의 양옆으로 낙엽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노랑 은행잎도 빨강 단풍도 녹색 잎사귀도 낙엽이 되고나면 모두가 평등하게 갈색이 된다. 차를 세워두고 그 숲속으로 들어가 바삭 바삭 갈색나뭇잎을 밟으며 걸어갔다. 내가 힘들여 올라갔던 길 위에 무엇이 있었고 왜 내가 거기 올라갔었는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나의 하산 길에서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간직해야할지도 생각하며….
<김용현 평화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