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운 (LA미주본사 경제부 기자)
‘연준에 맞서지 말라’는 말은 투자 시장의 오래된 격언이다. 기준 금리를 조정해 통화량을 결정하는 연방준비제도(FRB·연준)의 권력은 증시는 물론 부동산을 포함한 모든 자산 시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양적완화(QE)와 이에 따른 양적긴축(QT)까지 통화정책의 수단이 다양화되면서 그 힘은 더 커졌다. 어려운 말을 쓰지 않더라도 지난해 글로벌 자산시장의 폭락을 목도한 사람들은 연준이 우리의 계좌를 얼마나 망가뜨릴 수 있는지 실감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힘을 가진 존재의 품격이다. 품격은 말로 나타난다. 과거에는 연준의 두루뭉술한 표현이 문제가 됐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후 기자회견처럼 다양한 장소에서 언론을 만날때 지나치게 모호한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경제에 대한 연준의 스탠스를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수수께끼와 같았다. 다만 이해는 된다. 직설적인 표현은 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려는 그 나름의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연준이 바뀌었다. 최근 들어서는 자신의 입장을 비호하기 위해 과격한 표현을 쓴다. 시작은 지난 12월 FOMC 의사록이었다. 내용 중에 ‘대중의 오해(misperception by the public)가 금융 시장의 부당한 완화(unwarranted easing)로 이어진다면 우리의 가격 안정 회복 노력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부분이다. 연준이 12월 FOMC에서 ‘빅스텝’(기준 금리 0.5% 포인트 인상)을 밟았지만 채권 시장의 장기 금리가 반대로 일부 하락세를 보이자 불편한 심리를 노골적으로 내비친 것이다.
이후 드러난 연준의 태도는 더 가관이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닐 카시카리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지난해 미네소타대학 행사에 참석해 연준과 시장의 시각 차이를 묻는 기자를 만나 매우 날선 대답을 했다. 올해 하반기 연준이 금리를 내릴 것으로 보는 시장 참여자들의 반응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는 “시장이 치킨게임에서 패배할 것이다(They are going to lose the game of chicken)”라고 말했다. 중앙은행 당국자로서 시장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시장이 연준과 다른 길로 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시장은 금리 인상 효과가 경기 순환 싸이클에 미치는 속도가 연준 예상보다 빠르다고 본다. 최근 빅테크 기업들을 중심으로 해고가 급증하는데 각종 고용 데이터에 잡히지 않는 것을 보고 팬데믹 이후 통계 집계 방식에 오류가 생겼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아졌다. 금리를 더 올려 장기간 유지하려는 연준 의지와 달리 경제는 이미 백척간두에 놓여 있고 이 상황이 이어지면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다 경기 침체를 가속화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연준이 자주, 반복해서, 심각하게 틀렸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지난해 ‘자이언트 스텝’(기준 금리 0.75% 포인트 인상)을 네 번 연속 밟아야 했을 정도로 심각했던 물가 상승을 초래한 것은 연준의 실수였다. 2021년 연준은 심각한 인플레이션 초기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를 ‘일시적’이라고 오판했다. 사실 지금 인플레와 경기 침체 가능성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연준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올해 연초 시장은 연준에 맞선 사람들이 승리하는 장세였다. 채권 시장에서는 지난해 말 4%에 달했던 장기 금리가 3.5% 아래로 떨어졌고 증시의 경우 금리 인하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나스닥 기술주들이 급등하는 상황이다. 어쩌면 이제 시장은 연준을 ‘패싱’하는 단계에 들어섰을지도 모른다. 최후의 순간에 품격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 연준의 남은 과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