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시인 W.H 오우든은 여러분들과 제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서 “불안의 시대” 혹은 “염려의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문명의 발달은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편리함은 우리에게 더 많은 근심거리를 주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의 10대들이 무엇을 가장 많이 걱정하며 살고 있는지에 대해 조사한 통계에 보면 그들이 제일 많이 걱정하고 있는 것이 “핵전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전혀 걱정하지 않았던 새로운 걱정거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염려하는 그 문제보다도 문제에 대한 염려가 오늘의 현대인들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파괴하고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염려를 염려해야 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염려를 전문적으로 해결해 줄 전문적인 해결사를 요청해야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가장 인기있는 직종으로 등장하는 것이 카운셀러입니다. 이런 직업이 여러 형태로 우리 사회 속에 요청되고 있습니다.
어느 미국의 회사에서 사원들의 정신적 염려를 덜어 주기 위한 카운셀러 한 명을 채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카운셀러 후보생이 와서 회사 간부와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여러 가지 말이 오고간 후에 회사 간부가 후보생에게 질문할 사항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묻기를 시작합니다.
“일 년에 월급을 얼마나 주시겠습니까? 회사의 사원들은 어떤 문제를 주로 염려하고 있습니까? 왜 염려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요.”
이렇게 끊임없이 질문을 해대는 카운셀러 후보생을 한참 쳐다보던 회사 간부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도 걱정이 많군요?”
성경에는 염려의 본질을 두 가지로 규정합니다. 하나는 비생산적인 것이며 또 하나는 비신앙적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비생산성이란 마태복음 6장 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염려한다고 키가 자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현대인들은 이렇게 전혀 생산성이 없는 염려 속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설교가는 염려를 가리켜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염려란 마치 흔들의자와 같은 것이다.”
흔들의자에 앉아서 아무리 흔들어 보아도 제자리입니다. 아무리 염려해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염려 속에 몰두하여 계속 염려하고 또 염려하고 염려를 계속 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봅니다.
해결할 수 없는 염려라면 염려를 하지 마십시오.
또 하나는 비신앙적인 염려입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여기에서 염려는 다 이방인의 삶의 방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 예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 영생의 소망이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오늘에 몰두하고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이 어쩌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