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엇을 마실까?”(출15:24). 이 물음은 사람이 극한 상황에 도달했을 때, 가장 진솔하게 드러날 수 있는 본능적 욕구의 ‘군상(群像)’입니다. 그러나, 이 본능적 욕구의 저변에는 사람들의 <연약성(Weakness), 어리석음(Foolishness), 소심함(Timidity)>이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지금 <수르 광야길>을 사흘이나 걸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극심한 육신적 피로, 혼미한 정신적 불안, 무절제한 심리적 불만이 마침내 겉으로 표출된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솔직한 고통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속에 야훼 하나님을 향한 불만이 팽배하여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 크리스천들의 심리적 상태가 마치 광야길을 걸어가다 목마름의 갈증이 불평불만의 극단적인 심리표출로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라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연상할 수 있었기에, 또한 앞으로 오고 올 차세대들의 모든 공통적 심리가 명약관화하기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롬 12:2). 수르 광야의 사흘의 광야여정의 끝에 그들이 만난 “마라의 강” 앞에서 “무엇을 마실까?”라고 모세에게 항거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만의 저변에는 첫째는, 애굽을 그리워하는 과거지향적인 인간의 본능, 둘째는, 사막의 불볕 더위 속에서 해갈할 물이 없다는 무서운 시험에 직면한 위기상황, 셋째는, 끊임없는 비교본능으로 나일강의 향기로운 물과 마라의 쓴 물을 비교하는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수르 광야의 걷잡을 수 없는 피로와 더불어 식수고갈로 인한 심각한 고난을 겪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맞이한 것은 “마라의 강”입니다. 소원했던 것을 이루었는데 그 소원했던 것이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모순상황이라면 실망하고 자포자기하고 심지어는 체념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 현상입니다. “마라”의 뜻은 “쓰다”입니다. 목 마른 자에게 희소식은 “생수(Living Waters)”입니다. 그런데, 사막의 광야 길을 사흘씩이나 걸어서 기진맥진한 사람들에게 마라는 “써서 마실 수 없는 죽음의 물(Dead Waters)”입니다. 이것은 고난을 피하기 위해 인간적인 생각에 빠져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면 할 수록 <더 무서운 고난>이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광야 사흘 길의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음식’이나 ‘의복’이나 ‘주거환경’으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식수공급의 단절, 물 부족 현상이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전혀 마실 물이 없었던 때를 <희망을 100% 기대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비유한다면, ‘마라 강의 쓴 물’은 <희망한 것이 100% 성취한 현실 앞에서 그 희망의 결과가 100% 무용지물의 상황>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라 강의 사람들은 지금 포스터모더니즘 시대의 사람들과 동일하게 결핍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분별력(Discernment)’입니다. 광야와 가나안을 분별할 줄 모르는 영적 소경(Spiritual Blind)입니다. 야훼라파, 치료의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들어서 마라 강에 <생수의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그 나무는 곧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2).” 코로나바이러스 역병시대의 사람들, 마라 강을 만난 사람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은 언제든지 마라 강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광야와 가나안>을 구분할 줄 아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광야의 물이 쓴 맛의 모래 물이라면, 가나안의 물은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의 생수임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광야는 영주할 도성이 없지만, 가나안은 영주할 도성이 있는 신의 도성임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라 강의 교훈입니다. <분별력>은 시대를 초월하여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최상의 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