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과을의 존재성은 사람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으로 별다른 거름채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대상이다. 이를 국가 존립이라는 안정성 보장의 역기능으로 휘몰아가고있는 기현상 세태의 궁극이 궁금해진다. 지도자 자리는 지배하거나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다. 국민을 섬기는 마음으로 나라를 치리하는 지도자는 후일 두고두고 추앙을 받으며 역사 속에 남겨지고 있다. 갑, 을이 존재하는 사회는 정의로움이 바로 설 수 없다는 방정식이 성립된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식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문화 쇼크로 파생된 것이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충돌의 대세는 갑인지 을인지 구분하지 못한 착각에서 시작되는 건 아닐까. 서로가 사슬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이라 보이지 않는 라인을 넘어서거나 버티거나, 포기하거나 군림하는 것이라서 악순환이 차단된 살기좋은 세상의 도래는 묘연할 수 밖에 없다는 체념이 앞지른다. 갑의 자리가 언제까지 굳건히 유지되는 것도 아닌 것이 세상 살이의 묘수가 아닌가. 욕을 먹어도 싸다 싶을만큼 거리낌없는 횡포가 자행되고 있지만 갑들이 모르고 있는 부분이 있다. 갑질에 익숙했던 자가 을의 자리에 서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을로 옮겨지게 되면 추락이란 생각에 묶여버리지만, 을은 갑의 자리도 수용할 수 있음이요, 이해할 줄도 알거니와 품을 줄도 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을의 자리지만 갑질로부터의 염증을 기억하며 유치한 발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비루하고 추한 갑질에 길들여져 있더라도 명확한 본질 파악과 조율하는 능력은 키워가야할 것이다. 존경받을 만한 멋진 갑질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그나마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해서이다.
여늬 모임이나 공동체, 사회생활에서 부대껴야하는 갑, 을 관계는 역사적으로 존재성이 존속되고 있었다. 갑, 을의 유래는 계약서를 작성할 때나 임대인과 임차인 관계로, 보수를 제공하는 쪽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비대칭적인 권력 상하 관계라는 의미로 통용되어왔던 것인데 갑을 관계의 이슈가 권력의 갑질이라는 유쾌하지 않은 언어로 급부상한 느낌이 든다. 사회 전반에 갑의 오만이 당연시 된 듯한 뉘앙스가 역력하다. 근대 국가가 형성되기까지 우리 한민족은 단일민족으로 공동체를 이루어가며 혈연집단인 씨족 사회가 부족국가 개념으로 다양한 형태의 왕조시대로 이어져왔다. 이씨 조선시대의 절대 권력의 신분 계급 제도가 사회구조였던 시대에서 생소한 민주주의 국가 형태가 등장한 이후 사라질 것으로 간주했던 신분 차별화가 갑, 을의 형태로 되살아난 것이다. 불문율처럼 불평등이 자행되고 작금에 이르러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고질적인 갑질 흔적은 얼마든지 읊을 수 있다. 계층 간의 갑, 을 관계는 인간 기본권조차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땅콩회항 사건, 포스코 임원 기내 승무원 폭행 사건등 이미 알려진 사건들은 별도의 설명 없이도 갑질의 상징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거대 언론사의 기자들의 권한이 갑 오브 갑이란 유행어를 낳기도 했다.
태초부터 인간은 평등했던 것인데 갑으로 살아가는 길과 을이 되어 사는 길이 인류 역사 속에 유구히 흘러왔다. 가시적 아우라를 유세하듯 만연해있는 권력자들이 자행하는 성추행이며 소소한 손놈질까지 부끄럽게 구축되어온 추태이다. 갑질 피해자인 을들의 시대정신에 준한 반란으로 갑질이 폭로되고 무분별한 행위들이 밝혀지고 있는 셈이 된다
가정사도 예외는 아니다. 갑과 을의 자리가 말없이 존재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기류는 두 사람 밖에 모른다. 목소리 큰 사람이 갑이 되기 마련이다. 갑의 대접을 떳떳하게 받아 누리는 건 물론이려니와 남은 한 사람은 쓸쓸한 을의 자리로 전락하고 마는것이 보통 사람들의 의식구조다.
관계 셈법이 느린 사람은 차라리 자신이 처한 을의 자리를 감사로 받아들이고 만다. 부익부 빈익빈은 자유경쟁 국가에선 어쩔 수 없는 불가분 관계로 받아들인지 오래다. 부익부행태를 멀건히 바라보고만 있어야하는 빈익빈들의 좌절감, 굴욕감, 박탈감이 직설적인 표현으로 ‘갑질’이란 비하된 단어가 통용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갑, 을 사이의 골짜기같은 갭은 표현하기 힘들만큼 크고 깊다. 하룻밤 자고나면 소리없이 쩍쩍 벌어지고 있다. 을의 자리를 자처하며 차림이 허술해도 마음이 깨끗하면 정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이요, 권력을 움켜잡고 거대한 저택에 살아도 허름한 누더기처럼 바름과 그름을 식별 못한다면 불행한 삶을 자초하게 된다. 철이 들면서 한 계단 위에 서게되거나 한 계단 아래 서야하는 갈림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의 노을 무렵에서야 명예로운 을로 사는 길 위에 서있다. 세상 갑질 앞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사는 법을 익혀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