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님의 테마송에 후렴구가 있습니다. 그 후렴구는 “나는 그 자리에 늘 있어 왔느니라”
입니다. 이사야가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는 그 순간부터 예수님의 테마송은 “나는 그 자리에 늘 있어 왔느니라”입니다. 과거에도 늘 그 자리에 있어왔으며(과거), 지금도 늘 그 자리에 있으며(현재), 앞으로도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미래)는 약속의 은혜 언약입니다(사7:14, 마1:23, 28:20, 히13:8).
외로운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자리에 늘 있느니라. 야훼께서 여기에 계신다”(여호와 삼마, 겔 48:35). 희망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아 절망하여 낙심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용기 있게 일어나도록 그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며 탄식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자리(네 곁)에 항상 있어 왔느니라.”
시편 기자 다윗은 시편 56편에서 “주님의 눈물병(The Tears Bottles of the Lord)”을 붙잡습니다(시56:8, 84:6, 80:5). 여기에 대한 분명한 근거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체휼(體恤)하심으로 증거합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모든 고난, 모든 시험을 겪으셨도다” (히2:18). 예수님께서는 몸소 모든 고난과 모든 시험을 겪으신 진정한 메시아이시기에 <고난과 시험>을 온전히 제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을 담아둔 바로 그 주님의 눈물병에 시편 기자 다윗은 자신의 눈물까지도 담아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시 56편의 핵심입니다. 다윗은 더욱 더 강력하게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다윗이 <주님의 눈물병>을 붙잡고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로 무릎을 꿇었던 절절한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에는 사람이 눈물을 흘릴 때마다 <가죽병> 혹은, <유리병>에다가 얼른 그 눈물을 담는데 최소한 7~8cm에서 최대한 20cm에 이르기까지 각자 자신의 눈물병에 눈물을 담아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의 장례묘 안에 함께 이 눈물병도 매장하는 장례풍습이 성행했습니다. 만일 매장과정에서 실수로 그 눈물병이 깨어져서 땅바닥에 눈물이 쏟아지면 그 눈물병은 결코 매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경우의 죽음은 <부끄러운 죽음>으로 간주하는 장례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간절하게 다윗은 <주님의 눈물병>을 붙들고 <주의 생명책(The Book of Life)>에까지 기록된 것이라 부르짖어 간구하였습니다(시56:8).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 기도를 보고 계십니다. 죽음의 선고 앞에서 드린 <히스기야의 눈물 기도>가 있습니다(사38:5).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집요한 조롱 앞에서 드린 <욥의 눈물 기도>가 있습니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도다.”(욥16:20)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제절명의 순간에 드린 <다윗의 눈물 기도>가 있습니다(시56:8, “우리의 고통과 기도의 눈물은 천국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눈물의 기도자를 향하여 흘리시는 <주님의 눈물 기도>가 언약의 약속으로 축복하고 있습니다(눅 6:21,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이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눈물을 모르는 눈으로는 진리를 보지 못하며 아픔을 겪지 아니한 마음으로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독생자 아들을 통하여 통한의 눈물을 흘리신 하나님과 대속의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를 위하여 슬픔의 눈물을 흘리신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은 우리의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리니.”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 임이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물병은 생명책에 기록된 크리스천의 눈물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