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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셔에서] 당찬 시작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5-01-16 11:52:38

윌셔에서,허경옥,수필가,당찬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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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장미가 한 송이 앞마당에 피었다. 지난겨울 이사 올 때부터 마당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나무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놓인 디딤돌을 끼고 있는 작은 마당이다. 보통은 크고 작은 꽃들로 화려할 법한 그곳은 전 주인의 무관심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주변에서 굴러들어 온 덤불들이 마른 모래와 섞여 버석거리는 그 땅에는 흔한 잡초들도 보이지 않았다. 황폐한 땅 한 구석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키도 채 자라지 않은 작은 나무가 하나 빼빼 마른 모습으로 있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그 나무가 장미인 줄도 몰랐다.

날이 풀린 이월 말에 나만의 작은 꽃밭을 그곳에 만들기로 했다. 크고 작은 돌들을 골라내고 검불을 걷어 냈다. 비료가 섞인 흙을 사다 원래 있던 흙에 골고루 섞었다. 처마 밑 벽 쪽에는 키가 큰 목련과 치자나무를 심고 그 앞으로 꽃은 없어도 잎사귀가 큰 것을 심었다. 디딤돌 근처에는 채송화처럼 키가 작은 꽃들을 군데군데 심었다. 새로 단장하는 데 먼저 있던 초라한 보기 싫었다. 뽑아 버리고 새로운 나무를 심고 싶었지만, 거친 땅에서 홀로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니 함부로 대할 수 없어 그대로 놔두었다.

목련과 치자꽃은 일찍 피었다가 일찍 졌다. 그러나 앞쪽으로 심은 작은 꽃들은 다투어 피고 지고 하기를 여름 지나 가을까지 했다. 그 화사한 꽃들의 향연으로 드나드는 길이 언제나 행복했다. 꽃을 찾아 벌과 나비도 찾아 들었고 아침마다 새들이 몰려와 시끄러울 정도로 노래했다. 햇살마저 더 넉넉하게 들어와 오래 머무는 듯했다. 그러나 그 향연이 다 지도록 그 나무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미 죽은 나무인가 해서 가까이 가 들여다보면 새로 난 조그만 잎새가 나 아직 살아 있다고 가벼운 손짓을 하곤 했다.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아 겨울 같지 않은 플로리다지만 그래도 십이월이 되면 제법 쌀쌀하다. 찬 기운에 작은 마당 가득 피어오르던 꽃들도 모두 지고 줄기마저 시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회색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은 며칠 전, 곧 눈이라도 쏟아질 듯 스산하여 옷을 두껍게 입고 집을 나섰다. 꽃이 모두 진 앞마당은 여기저기서 날아든 낙엽으로 누렇게 덮였다. 마당이고 거리고 모두 갈색 천지다. 그런데 그 누런 세상에 느닷없는 빨간색이 하나 내 시선을 잡았다. 장미 한 송이가 하늘로 우뚝 서 있었다. 웬 장미? 다가가 들여다보니 그 보잘것없는 나무였다. 곧 죽을 것 같았던 나무가 장미였다니! 여름내 죽은 듯 있던 그 나무는 왜 이 겨울에 꽃을 피워 올렸을까? 모두 몸을 움츠리고 겨울잠으로 빠져드는 계절에 무슨 생각으로 새 생명을 내보냈을까? 너무 초라해 올봄에는 없애버리려는 내 속내를 알아차린 것일까? 화사한 꽃밭에 혼자 죽은 자처럼 누워 있다고 내심 못마땅해했던 것이 미안해진다. 막 피어난 작은 꽃에 생기가 가득하다. 주위 환경이나 타인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당당함도 보인다. 남들은 땅속으로 파고드는 추운 겨울에 새 삶을 시작하는 장미에서 남다른 다짐까지 느껴진다.

여러 가지 굴곡이 많았던 지난해였다. 또 다른 해를 맞자니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이번에는 어떤 어려움이 나를 향해 오고 있을까? 그러나 이제까지 이겨냈던 어려움을 기억해 낸다.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남아 차가운 겨울에 꽃을 피워낸 장미에서 힘을 얻는다. 새해를 향해 내딛는 발걸음에 그 당찬 기운을 꼭꼭 눌러 담는다. 새로운 시작이다.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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