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첫광고
엘리트 학원
경동나비

[삶과 생각] 돌풍과 눈보라 치는 밤이 지난 후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4-12-11 13:53:30

삶과 생각,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돌풍과 눈보라치는 밤이 지난 후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누가 스킨 케어

매서운 눈바람을 이기지 못해 쓰러진 나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급경사지에 서서 위태롭게 큰 몸을 지탱해온 고목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난여름 가지마다 까도토리 열매를 가득 달고 있던 갈참나무 줄기가 맥없이 찢겨 산책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밤새 얼마나 많은 눈이 퍼부은 걸까. 눈보라가 지나간 숲은 엊저녁 고즈넉하던 늦가을 풍경을 통째 잃은 모습이었다. 툭툭 부러진 잔가지들, 눈에 파묻혀 한쪽으로 누운 키 작은 수풀들, 얕은 뿌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쓰러진 큰 나무와 그로 인해 갈라지고 엉켜버린 서로 다른 수종들···.

돌풍이 불어와 300년 넘은 팽나무를 쓰러뜨렸던 어느 여름이 떠올랐다. 학교로 가는 길. 우리 동네와 이웃 동네 중간쯤에 있던 팽나무는 그 자체로 풍경이고, 전설이고, 온갖 상상을 자아내는 은유였다. 아이들 두 명이 양팔 벌려 감싸안아도 서로의 손가락이 닿지 않던 그 팽나무 중간쯤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누군가는 굴처럼 시커먼 그 구멍 안에 똬리를 튼 구렁이를 보았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그믐달이 뜨는 밤에만 팽나무 구멍에 나타나는 그 구렁이가 산 넘어 금당 저수지에 사는 이무기라고 했다. 금당에서 잉어와 가물치를 잡아먹으며 천년이나 용이 되기를 소망했지만 끝내 이무기로 남은 그 뱀이, 한 달에 한 번 땅 밑으로 이어진 굴을 따라 팽나무로 와서 그믐달을 올려다보며 새벽까지 울다 간다고 했다. 말 지어내는 재주가 용하던 동네 아주머니도 거들었다. 그이는 산 중턱에 사는 무당이 작년에 죽은 동네 아이를 그 팽나무 구멍 위에 앉혀놓고 남몰래 굿판 벌이는 걸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동네방네 떠들어댔다.

하필 팽나무 건너편에 있던 상엿집 때문이었을 것이다. 땅 밑에 이무기 전용 길이 있을 리 만무하다고, 그 아주머니야 본래 소문난 허풍쟁이라고 코웃음 쳤지만 저녁 무렵 혼자 팽나무 길을 지나치려면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50m쯤 전부터 심호흡을 하고 달려서 팽나무를 훌쩍 지나쳤다. 심장이 방망이질 칠 때까지 달리고 난 후에는 오늘 하루도 무사했구나, 습관처럼 팽나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팽나무가 한밤 돌풍에 넘어갔다고 했다. 논 아래로 처박힌 팽나무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겁에 질린 어른들은 젖은 눈가를 닦고, 초록 열매로 빼곡한 팽나무 가지를 꺾으며 아이들은 낄낄낄 웃어댔다. 쓰러진 후에야 전모를 드러낸 거뭇한 구멍은 터무니없이 얕았다. 뽑힌 나무뿌리 아래에는 이무기 길은커녕 두더지 굴도 보이지 않았다. 허무했다. 돌아보면 그건, 낡아 버린 한 시대의 종장 같은 풍경이었다. 어른들은 그 자리에 어린 은행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 그 나무들이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란 지금 팽나무 전설을 이야기하는 이는 거의 없다.

산책로를 가로막은 갈참나무 줄기를 조심조심 들어 길가로 옮겼다. 널린 잔가지들까지 주워 숲으로 던지고 나니 비로소 길다운 형태가 드러났다. 며칠 지나면 전문가들이 와서 상처 난 숲을 말끔하게 치료해줄 것이다. 노련한 그 손을 거치고 나면 내년 봄 이곳 풍경은 또 새로워지겠지. 하기야 숲이 아름다운 건 쉼 없이 죽고 사는 생물들 덕이다. 천년 묵은 이무기처럼 고여 있는 이야기는 또 얼마나 지루한가. 돌풍도 눈보라도 제 역할이 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댓글 0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의 시] 영혼에 밤이 오면
[내 마음의 시] 영혼에 밤이 오면

월우 장붕익 (애틀랜타문학회 회원) 꽃들도하늘의 얼굴에서 내리는눈물로 자라난다 옛사람은 죽기 전에 죽어보자고통과 즐거움에 절제하는 삶몸속에 숨은 자아가 깨어난다 슬픔도 사랑하자참고

[김용현의 산골 일기] 내리막길의 교훈
[김용현의 산골 일기] 내리막길의 교훈

평소 지나칠 만큼 절약생활에 투철했던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운전 중 네거리의 신호등이 보이기 시작하면 멀리서부터 엑셀레이더에서 발을 떼고 서행 모드에 들어갔다. 이유는 브레이

[특파원 리포트] 트럼프 칼 뺐지만…

미국에서 전기차 보조금 지원 등을 폐지하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계획이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에 막혀 좌초될 수 있다는 관측이 고개를 들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의 전

[애틀랜타 칼럼] 중년기의 위기

이용희 목사 축구 경기가 4대1인 상태에서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아직 지고 있는 팀의 코치는 휴식 시간에 락커룸에서 자기편 선수들에게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소리를 칩니다.

[법률칼럼] 학생비자(F1)&비지니스 설립

케빈 김 법무사   미국에서 유학생이 회사를 설립하고 사업을 운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잘못하면 불법 취업으로 간주되어 이민법 위반자가 될 수 있다. 외국인이라도 소셜번호만 있다면

[벌레박사 칼럼] 집안에 들어오는 뱀 퇴치하는 법

벌레박사 썬박 날씨가 추워지면서 고객들로부터 걸려오는 문의 전화의 내용도  달라지고 있다. 날씨가 더울 때는 집안에 개미나 바퀴벌레, 각종 벌레들이 나온다는 문의 전화가 많았다면,

[행복한 아침] 내려놓고 나서야

김정자(시인·수필가)          새벽 기도 예배 후엔 마을에 있는 공원을 찾곤 한다. 들릴 때마다 단풍이 예년보다 더 오래 느지막하게까지 피어있음이 반가웠다. 그간 며칠 내린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내 평생에 이르는 길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내 평생에 이르는 길

최 모세(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삶의 평생에 사람다움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삶의 어려운 도전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진실한 모습과 성실성에 의해 새로운 길이 열

[신앙칼럼] 아름다운 12월(A Beautiful December, 누가복음Luke 2:14)

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천상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모든 남자들과 모든 여자들에게 평화로다”(누가복음 2:14). 지극히 높은 곳을

[삶과 생각] 돌풍과 눈보라 치는 밤이 지난 후
[삶과 생각] 돌풍과 눈보라 치는 밤이 지난 후

매서운 눈바람을 이기지 못해 쓰러진 나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급경사지에 서서 위태롭게 큰 몸을 지탱해온 고목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난여름 가지마다 까도토리 열매를 가득 달고 있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