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가르기 바이러스에 걸린 미국 정치
오바마도 피해가지 못하고 분열 초래
협치 아닌 정치적 이해를 우선한 결과
폭도들의 의사당 점거, 민주주의 위기
21세기 미국 정치는 선진적, 초당적이란 평가를 받지 못한다. 빨간 나라와 파란 나라, 분열과 대치란 날 선 지적들이 대신하고 있다. 정치인들이 국가의 미래를 고민하고 현안의 해법을 찾기보다 자신들의 이해에 집착한 결과였다. 국가를 통치하는 권력은 정치적 싸움의 전리품이 아닌데도 정치세계는 당파와 당리를 위한 것 이외에는 모두 파괴해 버리는 갈라치기 독감에 걸린 듯했다. 그러나 갈라치기 정치가 남긴 유산은 새로운 합의의 전통이 아니라 분열된 미국이었다. 미국 민주주의에서 생각지도 못한 대선 불복 사태가 일어나고, 특정 진영 지지자들이 의사당을 점거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념적 진영뿐 아니라 인종, 성, 세대, 지역, 종교로 쪼개진 정치를 조화시키는 것이 더는 유효하지 않아 보일 정도다.
2001년 9·11테러는 미국의 국가적 위기였으나 한편으로 비타협적인 당파 정치에 종지부를 찍을 호기였다.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정부는 이런 여론의 기대와 달리 국가위기를 정치적 프레임으로 전환했다. 새로운 시대에는 그에 맞는 새 지도가 필요하듯 위기에 처하면 정치도 협치를 추구하게 마련이지만 이들은 달랐다. 부시 주변의 정치꾼들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 현안의 해법이 아니라 여론의 지지율, 선거의 승리였다.
부시의 선거전략을 맡았던 칼 로브는 어떤 가치와 정책으로 유권자 지지를 얻어 국가를 이끌지 고민하지 않았다. 테러의 공포조차 어떻게 하면 향후 선거에서 승리에 도움이 되느냐가 그에게는 보다 중요했다. 1기 부시 정부에서 백악관 참모로 있다가 뛰쳐나온 존 딜루리오는 당시 ‘로브 바이러스’에 걸린 백악관 인사들이 기본적인 정책에 대한 지식도, 알고자 하는 관심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정책이 아니라 언론이나 여론 대응에만 초점을 맞췄다. 부시 정부의 분열적이고 거칠고 비타협적인 정치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협치의 기회가 그렇게 사라지면서 부시는 중간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그 대가는 미국의 분열이었다.
그럼에도 2004년 부시는 재선 희망이 그리 높지 않았다. 인터넷 버블 붕괴의 여파는 계속됐고 이라크와의 전쟁은 수렁에 빠져 고전을 거듭했다. 이에 부시의 선거꾼들이 분위기 반전을 위해 위해 등장시킨 공약이 동성애자 결혼금지를 위한 헌법개정이었다. 성적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여론에 대한 기독교 우파의 반감을 이용하기 위한 갈라치기 공약이었다. 여성, 그리고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 문제는 흑인 차별과 동일한 연장선에 있는 위헌적 공약인데다 헌법 개정은 1차적으로 상하 양원의 3분의 2 동의를 얻어야 가능했다. 민주당의 반대가 불 보듯 뻔한 현실에서 개헌 공약은 처음부터 허위 공약이었다.
하지만 허위공약은 기독교 우파를 결집시킬 카드였고 예상은 적중했다. 실제로 이들의 몰표가 공화당으로 향하면서 부시는 백악관 재입성에 무난히 성공했다. 물론 공약 추진을 위한 헌법개정은 집권 내내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부시의 갈라치기 정치로 미국은 결국 9·11 이전보다 갈라졌고 정치는 더한 교착상태에 빠졌다. 영화 ‘돈 룩 업’의 대통령처럼 부시 정부가 정치적 이해를 위기 대응의 맨 앞에 놓은 데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버락 오바마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았으나 그의 집권 8년은 기대에 못 미쳤다. 무엇보다 부진한 업적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2009년 그가 집권했을 때만 해도 여론의 기대치는 높았다. 유권자들은 금융위기를 막지 못한 공화당에 책임을 묻고 민주당에 백악관은 물론 의회권력까지 넘겨주었다. 부시 정부가 분열시킨 협치와 포용정치, 희망의 복원을 그가 이뤄주길 원했다. 이런 여론의 지지를 업고 오바마 정부가 흔들리는 공화당을 포용하는 협치에 나섰다면 워싱턴 정치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출현이란 정치 이변이 발생하지 않았거나, 오바마의 위상이 제2의 링컨 반열에 올랐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오바마 역시 포용의 정치를 하지 않고 힘에 의존한 갈라치기로 나아갔다.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한 점을 이용해 밀어붙인 이른바 오바마 케어는 대표적이다. 전 국민에 의료보험 혜택을 제공하는 오바마 케어는 공화당 의원 전원의 반대 속에 민주당 단독으로 의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이는 향후 오바마 정부의 주요 현안에 대해 민주, 공화 양당이 타협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공화당이 모든 것에 반대만 거듭하자 오바마는 행정명령으로 현안을 해결하며 자신의 업적으로 남기려 했다. 이 같은 오바마의 일방주의에 돌아선 유권자들은 그의 계승자 격인 힐러리 클린턴 정부의 출현도 거부했다. 결국 오바마와는 정반대로 즉흥적이고 비논리적인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가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았다. 그리고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면서 오바마의 행정명령과 많은 정치적 유산들은 트럼프의 뒤집기로 시한을 다하고 말았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트럼프만큼 갈라치기로 미국 사회를 증오와 적개심에 휩싸이게 한 정치인도 드물다. 트럼프는 중도 유권자에게 다가서는, 표밭 확대를 위한 접근을 하지 않고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어젠다에 집중했다. 그의 갈라치기 정치에선 종종 역사도 의미를 상실했다. 트럼프는 유대인을 언급하지 않은 채 홀로코스트 기념일을 기렸고, 그의 대변인은 히틀러가 자국민을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
집권 2년째인 2018년 중간선거에서 트럼프는 느닷없이 시민권 논란을 일으켰다. 미국 내 출생자의 자동 시민권 부여를 폐지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불법 체류자와 그 자녀에게 시민권을 자동적으로 부여하지 않겠다는 억지 주장에 불과했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연방헌법에도 어긋나는 이런 주장을 제기한 것은 반이민 정서를 부추겨 지지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갈라치기 꼼수였다.
2020년 미국 대선 후보들의 TV토론은 최악이란 오명을 남겼다. 트럼프와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첫 토론은 특히 ‘호러 쇼’나 ‘망신’으로 칭해질 만큼 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지리라 믿기 힘든 인신공격과 거짓말의 난장이었다. 그러나 시대착오적이고 비논리적인 화법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트럼프에게 4년 전보다 더 많은 표를 던졌다. 이처럼 편 가르기 정치에 능한 트럼프에게 코로나19 사태가 없었다면 바이든은 낙선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사람들은 극단적인 정치인에 기대를 걸고, 그의 권력을 추종하기 마련이다. 트럼프 역시 자신의 지지세력에게 충실한 정책과 메시지로 충성도 높은 지지층과 진영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자아도취 한 사업가의 철없는 행각,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 같던 트럼프가 집권 내내 40%넘는 지지율을 유지한 배경이다. 그럴수록 사회 분열은 커져갔다. 특히 지지층을 겨냥한 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활동은 혐오와 거짓의 증폭기였다. 미국과 세계를 분열시킨 트럼프 정치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는 작년 1월 6일 세계를 놀라게 한 의회 점거 사태가 그대로 보여줬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폭도들의 의사당 점거는 위기에 놓인 미국 민주주의였다.
<이태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