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빛났던 것은 배우 윤여정뿐만이 아니다.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은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은 미국 작품이긴 하지만,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노영란(33) 애니메이터가 제작 초기부터 함께해온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노 애니메이터는 코로나19 여파로 인원이 제한되면서 시상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했지만, 다른 동료들과 라이브로 수상 소식을 접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정말 작은 프로젝트다. 저와 프로듀서 1명, 작가 2명, 이렇게 4명이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며 시작했는데, 완성하는 데 목표를 뒀던 작품으로, 끝까지 온 게 감사하고, 그래서 아직도 (아카데미 수상이) 실감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 애니메이터는 예술학교 교수의 추천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가로 꿈을 꿨던 그는 경기예고 만화창작과, 계원예대 애니메이션학과를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 예술학교로 유학을 왔다. 지난해부터는 학업을 마치고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작품은 총기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모의 이야기다. 노 애니메이터는 스크립트를 처음 봤을 때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소규모 프로젝트다 보니 캐릭터 디자인부터 스토리보드라고 일컫는 ‘콘티’까지 모두 노 애니메이터의 손을 거쳐 갔다. 작업이 진행되면서 다른 애니메이터들이 추가로 합류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작업을 혼자 하다시피 했다.
그렇게 완성한 작품은 흑백 톤이다. 게다가 인물들의 대사가 없어 오로지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작품은 총기사건이라는 예민한 소재를 다루는 만큼 전반적으로 차분하다. 학교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도 직접 묘사하지 않고 경찰차 소리나 빨간빛과 파란빛의 조명으로 암시한다.
노 애니메이터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 누구도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섬세하게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며 “시사회 때 실제 총기로 자식을 잃은 부모님이 오셔서 고맙다고 말씀해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작품 속 아픔을 삼킨 엄마와 아빠의 얼굴은 관록의 배우들이 펼치는 연기만큼이나 섬세하게 표현된다. 실제 노 애니메이터는 인물들의 표정을 그리면서 많이 고민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작품은 슬픔만을 다루지 않는다. 노 애니메이터는 총기사건 자체보다는 이로 인해 아픔을 겪은 가정이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희망을 보여주기 위한 애니메이션이라고 작품을 소개했다.
아카데미 수상으로 지인들의 축하 세례를 받고 있는 노 애니메이터는 한국을 떠날 때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선택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번 수상으로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가족들이 기뻐해 마음이 뭉클했다고 전했다.
노 애니메이터는 “지금은 기존에 같이 작업을 했던 팀과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며 “앞으로는 직접 글도 쓰고 감독이 돼서 라이브 액션 필름(실사영화)도 찍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