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 시쯤이었다. 원고를 쓰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키보드를 더 이상 두드릴 수 없게 되자 나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마트의 채소칸에는 껍질이 벗겨진 옥수수만 남아 있었다. 스티로폼 접시에 담기고 랩에 꽁꽁 싸인 찰옥수수 4개 4,000원. 아쉽지만 이거라도.
집에 발을 들여 놓기가 무섭게 냄비에 물과 함께 담아 올렸다. 찰옥수수라 했으니 조금 넉넉하게 삶아야지. 그러나 적당히 식을 때까지 기다려 한 입 크게 베어 문 옥수수는 초당이었다. 알갱이에 자르르 흐르는 특유의 윤기도 가셔 있었기에 나는 이것이 찰옥수수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맛이 완전히 빠져 껍질만 질겅질겅 씹히는 초당 옥수수는 슬픈 맛이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곧 손의 떨림이 가라 앉았고 나는 다시 책상에 앉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고를 계속 썼다.
옥수수는 찌기보다 삶아야 조리 시간이 짧고 간도 적당
노란 옥수수보다 초당 옥수수나 찰옥수수를 주로 생산
이게 다 옥수수때문이었다. 옥수수가 옥수수때문이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나는 근 열흘 전 인터넷 오픈마켓을 통해 찰옥수수를 서른 자루나 주문했다.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도 옥수수 알갱이처럼 수많은 판매처가 쏟아지는 가운데 지역 영농조합이 직접 판매한다는, 배송일이 가장 빠른 것을 골랐다. 사나흘이면 받겠지. 냉장고에 옥수수 서른 자루를 넣을 공간이 나오는지도 제대로 헤아리지도 않고 나는 덥석 구매 버튼을 눌렀다. 바로 오늘의 원고를 위해 오랜만에 이것저것 만들어 보고 싶었다.
‘옥수수가 잘 여물지 않아서 걱정입니다ㅠㅠ’ 이런 문자 한 줄을 덜렁 남긴 채 배송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았다. 옥수수를 이렇게 기다려서 먹어야만 하는가. 물론 따는 순간부터 단맛이 사라지기에 최대한 싱싱한 옥수수를 먹는 게 좋기는 하다.
그렇지만 기다림이 길어지면 사람은 양 극단으로 반응하게 된다. 목표로 삼았던 음식에 아예 관심과 흥미를 잃어버리거나 또는 정반대로 스스로 엄청난 기대를 품게 된다.
말하자면 마음 속으로 아직 먹어보지도 않은 음식에 양념을 치고 또 치는 것이다. 음식평론가로서 줄 서서 먹는 맛집에 웬만하면 가지 말라고 제안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크게 실망하거나 맛이 없었음에도 있었다고 믿으려 애쓰는 상황이 벌어진다.
■초당은 무르고, 찰옥수수는 딱딱해
어쨌든 본의 아니게 열흘 가까이 옥수수의 꿈을 꾸었다. 요즘 내가 꾸는 옥수수의 꿈은 불완전하다. 내가 가장 옥수수다운 옥수수라 믿는 노란 옥수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맞다, 이제는 통조림으로만 존재하는, 그리고 ‘옥수수콘’이라는 말도 안 되는 명칭으로 불리는 바로 그 옥수수이다.
이 칼럼을 연재하며 종종 듣는 이야기가 있다. 왜 없는 걸 굳이 들먹여가며 식재료의 현실을 폄하하느냐는 일종의 이의 제기이다. 그런 논리를 따르자면 노란 옥수수의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게 좋다. 있는 걸 잘 먹기도 번거롭고 바쁜데 굳이 없는 걸 들먹여봐야 입맛만 떨어질 수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노란 옥수수의 부재는 아쉽다. ‘우리 아기 불고 노는 하모니카는 옥수수를 가지고 만들었어요/옥수수알 길게 두 줄 남겨가지고 우리 아기 하모니카 불고 있어요’ 무엇보다 윤석중 작사, 홍난파 작곡의 동요 ‘옥수수 하모니카’의 가사처럼 아기도 무리 없이 깔끔하게 두 줄만 남겨 하모니카를 만들 수 있는 옥수수이기 때문이다.
찰옥수수의 알갱이가 좀 더 깔끔하게 떨어지지만 딱딱해서 아기가 편히 먹기에는 무리가 있고, 요즘의 대세인 초당옥수수는 정반대로 너무 물러 쥐어 뜯어 먹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아기의 하모니카를 넘어 어른의 요리 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초당과 찰옥수수 둘 다 그대로 먹기에는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음식을 만들어 먹기에는 각각의 무르고 단단함이 약점이 된다.
그냥 먹든 요리를 만들든, 옥수수는 일단 찌거나 삶아야 한다. 초당 옥수수는 생으로 먹어도 된다고들 하지만 특유의 풋내가 썩 유쾌하지는 않다. 나는 삶는 쪽을 선호한다. 조리 시간도 짧고 간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옥수수를 삶을 때에는 ‘뉴 슈가’, 즉 사카린이 손맛의 비밀처럼 전해 내려 왔다.
하지만 초당이 정복한 맛의 세계에서는 의미가 없어졌다. 너무 달아서 ‘초당’이라는 이름이 붙은 옥수수에 더 이상의 단맛을 보태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금만 두세 자밤쯤 넉넉히 더해 삶는다. 길지 않은 조리 시간과 다소 질긴 껍질을 감안하면 알갱이에 간이 쏙쏙 배지는 않지만 대에 맛을 보태준다. 알갱이를 뜯어 먹는 가운데 대를 물고 빨면 달콤짭짤하고도 구수한 물이 잔뜩 배어 나오는데, 이게 별미이다. 옥수수가 싱싱할수록 대에서 배어 나오는 물도 맛있다.
옥수수를 요리로 승화시키고 싶다면 가장 손쉬운 구이부터 시도해보자. 삶은 옥수수에 상온에 두어 부드러워진 무염 버터를 발라 그릴팬이나 프라이팬 등에 올려 조금씩 돌려가며 굽는다. 이미 삶아 익혔으므로 버터의 풍성함과 약간의 불맛을 입힌다는 기분으로 잠깐 구워주면 된다. 버터 덕분에 캐러멜화가 일어나 몇몇 알갱이가 짙은 갈색을 띠면 다 익은 것이다. 그냥 먹어도 좋지만 카이엔 페퍼(혹은 한국 고춧가루)로 매콤함을, 파프리카 가루로 달콤함을 더하면 한결 더 맛있다.
■샐러드, 수프로도 활용
삶는 것만으로 요리의 바탕 노릇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버터를 발라 한 번 구워줬을 때 옥수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를 완벽히 마친다. 여름 식재료인 옥수수에게 샐러드만큼 잘 어울리는 음식도 없다.
일단 알갱이가 끝나는 부분의 밑동을 칼로 썰어 안정감을 준 뒤 옥수수를 세운다. 그리고 끝을 잡고 칼날로 옥수수 알갱이를 썰며 훑어 내린다. 알갱이를 사각사각 썰어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데, 이 재미에 휩쓸려 칼날을 너무 깊이 넣어 훑었다가는 이에 끼기도 하고 잘 안 씹히는 대까지 함께 썰 수 있으니 주의한다.
옥수수 알갱이 가운데 대 위로 올라온 부분만 훑어 낸다고 생각하고 칼질을 하면 편하다.
샐러드야 무한에 가깝게 식재료를 조합해 만들 수 있는 음식이므로 아주 세심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다. 다만 옥수수 알갱이의 크기에게 주는 주도권의 정도에 따라 질감을 비롯한 음식의 느낌이 달라질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옥수수가 중심인 샐러드를 먹고 싶다면 다른 식재료 또한 알갱이의 크기에 최대한 맞춰 잘게 썰거나 다져 주는 게 좋다. 오이나 올리브, 양파나 샬롯 같은 식재료라면 무리가 없지만 토마토나 아보카도 같은 채소는 그렇게 잘게 썰기도 마땅치 않을뿐더러 질감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후자로 샐러드를 만든다면 옥수수가 주연보다는 조연 역할을 맡도록 주도권을 조정하는 게 조금 더 자연스럽다. 한편 드레싱의 경우 모 프라이드 치킨 브랜드의 곁들이처럼 마요네즈를 써도 좋지만 한여름이라면 좀 더 가볍고 상큼한 비네그레트를 권한다. 옥수수는 레몬보다 라임즙이, 그리고 사과 사이더 식초가 더 잘 어울리니 참고하자.
산과 기름을 1:3의 비율로 섞고 다진 마늘이나 파 또는 샬롯을 더하고 소금과 후추로 간한 뒤 거품기로 휘저어 걸쭉하게 유화를 시키면 드레싱이 완성된다.
다음으로는 수프가 있다. 옥수수맛이 인스턴트 수프의 대표 노릇을 하는 세계다보니 직접 끓여 보라는 권유가 크게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한 번쯤 끓여 보는 것도 좋다. 무엇보다 지금껏 옥수수맛이라 믿고 먹어왔던 것과 진짜 옥수수로 끓인 수프의 맛 차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엄청나게 손이 많이 가지도 않는다. 알갱이를 칼로 훑어내 굽기까지 했다면 그대로, 삶기만 했다면 약불에 냄비를 올려 노릇해질 때까지 버터로 볶는다. 서양식 수프에는 닭육수가 기본이지만 여름에 가볍게 먹을 요량이라면 물이나 우유만 더해 보글보글 끓인다.
요즘처럼 제철에 정말 싱싱한 옥수수를 구했다면 껍질을 깨끗이 씻어 옥수수차처럼 끓여 낸 국물로 수프를 끓이면 한결 더 맛있다. 초당이든 찰옥수수든 껍질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으므로 블렌더로 수프 전체를 갈아 체로 내린 뒤 생크림을 더해 한소끔 끓여 마무리한다. 뜨거울 때야 기본으로 맛있지만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혔을 때 옥수수의 맛을 한결 더 또렷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먹으려고 옥수수를 서른 자루나 주문했다. 삶고 굽고 샐러드도 만들고 수프도 끓이고, 남은 건 플라스틱 랩으로 꽁꽁 싸서 냉동실에 두었다가 야금야금 꺼내 먹고 싶었다. 주문하고 열흘이 지나 원고를 쓰는 바로 오늘, 늦잠을 즐기는 사이 택배 기사가 옥수수 한 상자를 놓고 갔다. ‘어제 발송했는데 보내느라 바빠서 이제서야 알린다’는, 이른 아침에 보낸 안내 문자도 와 있었다. ‘뉴 슈가와 소금을 넣고 30~40분을 삶고, 버터를 발라 구워 먹어도 맛있다’는 조리 요령도 딸려 왔다.
드디어 왔구나. 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상자를 뜯고 옥수수의 껍질을 벗겼다. 이상하게도 빈약하다는 느낌이 드는 옥수수는, 껍질을 다 까보니 흔히 살 수 있는 것의 절반 굵기로 웃자란 것이었다. 다른 것도 허겁지겁 껍질을 벗겨보니 전부 마찬가지였다. 열흘을 기다렸는데 이런 걸 보내다니. 속이 너무 상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내 옥수수 서른 자루의 꿈은 산산이 깨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