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支泉) 권명오(수필가 / 칼럼니스트)
80년 전 시골에서 살던 시절 교회가 없었고 기독교 자체도 전혀 몰랐다. 불교 아니면 유교를 믿었는데 그 또한 불경도 모르고 유교에 대한 교리도 잘 몰랐으며 1년에 한번 소풍 따라 절에 가는 정도였고 유교는 조상에 대한 성묘와 제사가 전부였다.
서울이나 대도시 사람들은 기독교와 불교, 유교에 대한 지식이 있고 또 일부는 유신론과 무신론에 대한 일가견이 있든 구한말 선교사들에 의해 성당과 기독교 교회가 서울과 각 도시에 세워졌는데 어느 날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인데 그 분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전도를 해 배우다가 6.25 남침으로 인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정신없이 헤매면서 완전히 교회와 인연이 끝났다. 그 후 휴전이 된 후 각 지역 UN군들이 교회를 지어 주었는데 내 고향 가월리에도 호주 군인들이 언덕 위에 크게 교회를 짓고 전도사까지 모셔와 목회가 시작됐다. 하지만 시골 개척교회에 대한 실상은 사면초가였고 불교와 유교와 토석신앙 밖에 모르는 시골사람들은 무조건 기독교를 반대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도 못 지내게 하는 예수쟁이라고 비판하면서 자녀들을 교회에 못 가게 했다.
그 당시 고등학생이였던 나는 친구들과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없고 알지도 못했다. 그후 대학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하다가 방학 때 고향친구들과 신나게 동동주 술타령을 하다 더워서 시원한 언덕 위 교회 밑에 들어가 고성방가를 하다가 전도사님을 만났다. 입장이 난처했는데 전도사님이 친절하고 편하게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에게 객지생활이 힘들겠다고 하며 혹시 시간이 되면 교회를 나오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예하고 대답을 했기 때문에 주일날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그런데 교회의 형편이 너무나 열악하고 교인도 어린 학생들 뿐이고 성인은 4명 정도였다. 그 때문에 전도사님 의식주가 시급한 상태라 할 수 없이 도우면서 교회를 다니게 됐다.
이북에서 피난 온 전도사님 여동생이 서울에 큰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큰 교회 제직들과 함께 전도사 오빠의 개척교회를 도왔고 생활비도 도왔다.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봉사부장 직분을 수행하게 됐고 믿음과 신앙심과는 상관없이 교회를 돕게 됐다. 성탄절에는 성극 “돌아온 탕자”를 직접 쓰고 연출도 했다. 개학 후엔 주말에만 참석하다가 연극활동이 바쁘고 난관이 많아 교회와의 인연이 끝났다. 그리고 군 생활 3년이 끝난 후 본격적인 TV 출연 연기생활이 바빠졌고 예술분야에 깊이 빠져 유신론보다 무신론에 깊이 심취돼 교회와는 멀어졌고 그후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한 후 다시 신앙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은 애틀랜타 섬기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모자라고 부족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 부부는 열심히 성경공부도 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감사하며 살고있다. 그래도 또 죄도 짓고 실수도 할 것 같아 죽는 그날까지 열심히 믿고 배우련다. 간증할 것도 많지만 지면상 다음으로 미루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