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이번 칼럼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성장’에 관한 많은 참고 서적들이 나오는데 그 대부분이 이러한 성장의 수단으로서 자신과의 대화와 인간 상호간의 만남의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성장이 의미하는 것을 나타내는 일은 흥미롭고 어렵다. 우리들 개개인은 어떤 다른 사람들 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홍익 인간의 예를 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칼 로저스(Carl Rogers)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전기능을 갖춘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일생에 걸친 동적인 과정이므로 성장은 기능면에서 정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브랜데이스 대학교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아브라함 매스로우(AbrahamMaslow)는 이런 사람을 “자기를 실현하는 사람” 또는 “전인”이라고 한다. 전인은 내향성과 외향성의 균형을 유지한다.
극도로 내향적인 사람과 지극히 외향적인 사람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내향적인 사람은 거의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둔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 몰두해 있기 때문에 외부의 넓은 세계에서 동떨어져 있다.
극도로 외향적인 사람은 자신을 노출시키고 주위가 산만하다 그의 생활은 전혀 사려 깊지가 못하고 따라서 아무런 내적인 깊이도 없다. 소크라테스는 “사려깊지 못한 생활은 가치 있는 삶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성장의 첫 번째 조건은 조화이다. 내향성은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를 경험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는 자신의 감각. 감정. 정신과 의지의 원동력을 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육체와 정서적 활동에 대해선 절대 이상 스러워 하거나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의 감각이 그에게 아름다움과 병을 함께 갖다 주어도 그는 다 받아 들인다. 그는 근심에서 부드러움에 일기까지의 모든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의 정신은 생기 있게 무엇인가 추구하고 의지하는 모든 선한 것을 보다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또 동시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기존의 것을 향유하기 위해 애쓴다. 그는 자신에게 귀기울여 왔다. 그래서 자신이 악하고 놀라운 일은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향성은 자기 수용을 내포한다. 바람직한 내향성은 충분히 기능적이고 실제적인 전인이 육체적, 심리지적, 정신적 궁핍과 할동에 관해 알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좋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그는 육체뿐만 아니라 적대감, 충동, 생각, 욕망 등의 감정면에 있어서도 편하다. 그가 이미 경험한 것에 있어 편할 뿐 아니라 그는 새로운 충동보다 깊이 있고 전에 없던 감정 반응, 변화하는 생각과 욕구 등에 대해서도 개방적이다.
그는 성장이 변화 자체이므로 내부의 조건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을 받아들인다. 인간으로서 그의 궁극적인 운명은, 즉 죽을 때 그가 무엇이 될 것인가는 기꺼이 알려지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인간의 성장 양식도 미리 짜여질 수는 없다. 그는 다른 사람처럼 꾸미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이고, 새로운 경험에 의해 나날이 새로워지는 잠재적인 자아는 그가 성장의 한 단계에 국한되지 않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또 지적으로 자신을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자신이 선하다는 것을 안다. 또 그의 잠재적인 자아가 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한계에 대해 현실적이다. 그가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에 대해 꿈도 꾸지 않으며 그저 나는 이러 이러한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데 인생의 나머지를 허비한다. 그는 현재의 자신에 대해서만 경청하고 탐구하고 사랑해 왔다. 그리고 매일 매일의 자신이 경험한 것은 새로운 날처럼 새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늘 변화하고 있고 계속 변화하는 성질을 혁신하는 걸 나타낸 항상 새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생활에서 부딪치는 모든 도전에 적응할 수 있고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 수단, 자신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