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보조금 64억달러 받아
삼성전자가 15일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대한 투자 확대를 최종 결정하면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시장을 둘러싼 삼성과 TSMC, 인텔 간 정면 승부의 막이 올랐다. 미국 정부가 상대적으로 투자금이 적은 삼성에 ‘통큰’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해 미국의 ‘칩 아메리카’ 전략에서 삼성의 비중이 더 커질 것이라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대목은 삼성이 미국 본토에서 파운드리 경쟁 업체들과 최첨단 공정 경쟁에 맞불을 놓았다는 점이다. 현재 삼성이 짓고 있는 테일러시 파운드리는 4㎚(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을 활용한 팹이다. TSMC가 엔비디아와 애플의 최첨단 칩을 수주받아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대만의 현지 팹과 같은 공정이다. 물론 4나노 공정만 해도 최첨단 생산 시설이지만 인텔이 올 연말 1.8나노 제품 양산을 선언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인공지능(AI) 칩 수주 전쟁에서 삼성이 불리한 위치에 처할 수밖에 없다. 앞서 TSMC 역시 미국 애리조나주 공장에서 1~4나노 공정을 모두 커버하는 3개의 팹을 2028년까지 짓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삼성이 2나노·4나노 공정의 추가 팹을 신설하기로 최종 결정하면서 앞으로는 경쟁 업체들과 진검 승부가 가능해졌다.
단순히 첨단 생산 라인만 늘리는 게 아니다. 삼성은 이번 추가 투자를 통해 최첨단 패키징(여러 반도체를 하나로 연결하는 공정) 라인도 함께 짓기로 확정했다. 생산부터 패키징까지 연결된다. 제품 수주 단계에서부터 발주사들과 머리를 맞대야 하는 파운드리 산업의 특성상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해지면 제품 수주가 더 유리해진다고 보는 이유다. 삼성은 특히 파운드리부터 메모리까지 한꺼번에 생산해 패키징한 뒤 고객사에 배달하는 ‘턴키’ 서비스를 자신들의 차별점으로 마케팅해왔는데 이 같은 장점이 더욱 극대화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을 비롯해 TSMC와 같은 반도체 기업들은 최선단 마더팩토리는 본국에 두고 후세대 양산 라인을 다른 나라에 설치하는 투트랙 전략을 펼쳐왔는데 미국의 ‘당근과 채찍’ 전략에 따라 작전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며 “결과적으로 앞으로 미국 시장이 더욱 치열한 격전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구상하는 칩스 동맹에서 삼성을 비롯한 한국의 위상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이 미국 투자금(400억 달러 이상) 대비 받는 보조금(64억 달러)의 비율은 약 16%다. 이는 인텔 8.5%, TSMC 10.2%보다 높다. 한마디로 경쟁 회사보다 투자는 적게 했는데 지원금은 더 많이 챙긴 셈이다. 양안 관계 긴장에 따른 불안감과 최근 대만 강진으로 확인된 생산 차질 리스크 등을 모두 감안하면 미국 역시 대만 독점 시장 구도를 깨고 삼성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갈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반도체 생산기업으로서 삼성전자의 역량과 투자 의지에 대한 미국 정부의 높은 신뢰가 이번 보조금 협의에서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다만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처럼 미국의 막대한 보조금이 향후 반도체 생태계 자체를 흔들 수 있다는 점은 부담이다. 이종환 상명대 교수는 “삼성도 자신들이 짜 놓은 시간표에 따라 이번 투자를 결정했겠지만 기업의 투자 여력은 한정돼 있고 앞으로 실적이 어떻게 나올지도 예측하기 어렵다”며 “우리 반도체 생산 시설이 해외로 유출되지 않도록 정부가 보조금·인허가 등에서 강력한 유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경제=서일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