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B 대책 72시간 막전막후
미 정부 “부자만 배불려” 회의적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가 당초 우려했던 ‘블랙 먼데이(월요일 증시 폭락)’ 없이 일단 진정 국면에 들어간 건 미 연방정부의 ‘예금 전액 보증’ 등 발 빠른 대책 발표가 크게 작용했다는 평가가 많다. 정치적 공방 성격이 짙긴 하지만 일각에서 ‘사실상 구제금융’이라는 논란도 일고 있는 이 같은 정책 결정의 배후에는 실리콘밸리의 부유한 ‘후견인들’이 정부에 가한 로비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지난 10일 금융당국의 SVB 폐쇄 명령 직후 미 재무부에선 정부의 적극적 개입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11일부터 기류가 급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WP는 ‘은행 위기로부터 미국을 구하기 위한 72시간’ 제하의 기사에서 SVB 파산 사태 대책 수립에 관여한 20명의 인터뷰를 토대로 3일간의 의사 결정 과정을 재구성했다.
SVB 파산 결정 직전인 10일 오전, 레이얼 브레이너드 미국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등 경제 고문들은 조 바이든(사진^로이터) 대통령에게 “SVB 붕괴 여파가 다른 은행으로 전염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초기엔 “(정부 개입 땐) SVB 붕괴로 손해를 본 실리콘밸리의 현금 부자들만 혜택을 본다”는 냉소적 반응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보험사 구제금융에 세금을 쏟아부었던 조지 부시 행정부가 십자포화를 맞았던 사례에서 비롯된 학습 효과였던 셈이다. 하지만 SVB와는 무관한 전국의 은행들에서 현금 인출 시도가 급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금융시장 패닉으로 번질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11일 연방정부의 첫 대책회의가 시작됐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과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과, 마틴 J. 그루엔버그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회장 등 규제당국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뱅크런(대규모 인출사태)을 막기 위해 법적 보호 한도인 25만 달러가 아니라, SVB 고객 전원에게 예금 전액을 보장해 주자는 방침은 여기서 나왔다.
다만 일사천리로 이런 결정이 내려지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 당국자는 WP에 “재무부 내에선 다소 과도하다는 우려가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블랙 먼데이 현실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정부의 적극 개입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기류가 확 바뀌었다고 했다. 이 당국자는 “(SVB의 고객인 스타트업의) 대규모 실직을 막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에 막대한 기부금을 냈던 실리콘밸리의 ‘큰손’들이 스타트업 줄도산을 우려하며 ‘로비’에 나섰다는 게 WP의 설명이다. 특히 구글과 페이스북 등의 지분을 보유한 투자자 론 콘웨이, 샌프란시스코가 지역구인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 등이 “예금자 보호를 하지 않으면 대량 실직이 불가피하다”며 정부 개입을 요구했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지역 의원을 비롯한 민주당도 적극 가세했다. ‘줌 미팅’ 등을 통해 “100만 명 이상의 근로자 급여가 SVB에 보관돼 있다”며 주말 내내 정부를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개입’에 거부 반응을 보였던 바이든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인 결정적 장면이었다.
백악관은 11일 저녁, 금융당국이 마련한 대책에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①정부가 SVB 고객의 모든 예금 전액을 보장하고, ②연쇄적인 은행 파산을 막기 위한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가동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예금 보호 자금도 납세자 세금이 아니라, 은행들이 낸 예금보험기금에서 충당하기로 했다. 금융당국은 12일 ‘은행 지원방안’ 초안을 마무리하고, 이날 오후 6시에 발표했다. 이튿날 바이든 대통령은 “모든 미국인은 필요할 때 예금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폭풍과도 같았던 ‘72시간’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