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초기 마스크 생산량을 늘려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을 묵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9일 주요 마스크 제조 업체인 '프리스티지 아메리테크'가 지난 1월22일 보건복지부에 마스크 생산 기계를 복구해 생산량을 늘리자는 의견서를 보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미국에 코로나19 환자가 처음 보고된 이튿날이다.
당시 이 회사의 마이크 보웬 부회장은 홍콩과 같은 나라에서 마스크 주문량이 증가하자 국내에서 의료용 N95 마스크 생산을 국가 안보 문제로 인식하고 정부에 우선권을 주기 위해 보건복지부와 접촉했다고 한다.
보웬 부회장은 로버트 캐들렉 질병 준비 및 대응 담당 차관보를 포함한 보건복지부 고위 관료에게 이메일을 통해 "우리 공장에 N95 생산 라인이 있는데 이를 재가동하는 게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심각한 상황에서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웬 부회장은 "지금도 전화 주문이 몰리고 있어 정부 수주는 필요 없다"며 "단지 상황이 악화할 경우를 대비해 알려주는 것이다. 나는 애국이 먼저고, 사업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측은 답장에서 "아직 정부가 이에 대한 답변을 내놓을 상황은 전혀 아닌 것 같다"고 답해 보웬 부회장의 제안에 즉각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WP는 전했다.
결국 정부는 보웬 부회장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고, 이 회사에는 한 달에 700만개의 마스크를 생산할 수 있는 라인이 있지만 여전히 가동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보웬 부회장의 제안은 보건복지부 산하 생물의약품첨단연구개발국(BARDA)의 국장이었던 릭 브라이트가 폭로한 89페이지짜리 문서에 간략히 포함돼 있다.
브라이트 전 국장은 정치보다 과학과 안전을 우선시하려다 캐들렉 차관보 등으로부터 보복을 당해 지난달 말 직무에서 배제된 후 국립보건원으로 전보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 치료제 후보로 극찬한 말라리아 치료제 하이드록시클로로퀸과 클로로퀸의 효능에 의문을 제기했던 인물이다.
공개된 이메일에 따르면 브라이트 전 국장은 캐들렉 차관보를 비롯한 보건복지부 지도부에 마스크 부족 사태에 대해 설득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코로나19 사태 초반 마스크 생산량을 늘릴 기회를 놓쳤고,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나 바이러스가 일파만파로 확산하자 미국에서는 마스크 대란이 벌어지면서 의료진이 위험에 빠지게 됐다.
이때부터 트럼프 정부는 통상 가격의 몇 배를 주고서라도 마스크를 조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비상 행정명령을 통해서라도 민간 기업에 마스크 생산량을 늘리도록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됐다고 WP는 지적했다.
보건복지부 측은 보웬 부회장의 제안서에 대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WP의 요청에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한 정부 고위 관료는 익명을 전제로 "보웬 부회장은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라며 "그러나 보건복지부가 당시에는 예산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다른 보건복지부 관료는 "정부에는 계약 절차가 있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만큼 빠르지 않다"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