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구호물자
밥의 단맛, 김치 신맛과 삼각균형
한국서 미국 다음으로 많이 팔려
깡통 째 완전히 익은 상태 판매
더운 밥엔 차게, 찬밥엔 뜨겁게$
간편함 활용하면 맛↑ 설거지↓
노란 플라스틱 뚜껑^깡통
분리해 버리는 성숙함 더해져야
대학 시절, 마장동 축산물 시장에서 2년 조금 못 되게 자취를 했다. 학교 근처의 원룸과 같은 가격에 작업이 가능한 공간을 찾다 보니 조금씩 위로 올라가서 결국 시장 어귀의 구멍가겟집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집이 넓어지다 보니 학교 친구들을 불러 밥을 같이 해 먹는 일이 잦아졌는데, 당시 나의 대표 메뉴는 매운 스팸 카레였다. 매운 스팸을 각 변이 2㎝의 정육면체로 썰어 기름에 볶아, 맛이 배어 나오면 여느 카레와 같은 요령으로 끓인다. 지금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보잘것없는 솜씨였지만 친구들은 그래도 잘 먹었다. 아쉽게도 마장동을 떠난 뒤 어느 시점에서 매운 스팸은 단종되었다.
특정 상품의 명칭이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다뤄도 될까 고민을 좀 했다. 하지만 딱히 대체할 단어도 없고, 바꾸면 그야말로 ‘제맛’이 안 날 게 뻔하다. 다른 콜라 음료가 존재하지만 코카콜라가 전 세계적인 대표로 자리를 잡았듯, 깡통에 든 이 돼지고기 가공품 또한 스팸이라는 명칭이 널리 퍼진 나머지 일반 명칭처럼 자리 잡았다. 또한 스팸이 굳이 고유함만 벼슬처럼 머리에 쓰고 거들먹거리는 것도 아니다. 대표적인 유사상품과 비교하면 돼지고기 함유량이 가장 높다. 말하자면 ‘구관이 명관’인 셈이다.
명절 선물의 왕좌를 차지한 구호식품
전쟁 탓에 자리를 잡은 일종의 구호식품이 우리의 식탁에 자리를 잡고, 몇 걸음 더 나아가 명절 선물의 왕좌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못 해 신기할 지경이다. 스팸이 인기가 높은 나머지 올해는 안타까운 소식마저 들었다. 추석을 앞두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 주택에 스팸 선물세트가 여러 점 들은 상자를 열몇 개 배송하는 바람에 계단을 예닐곱 번이나 오르내렸다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사연이었다. 가뜩이나 열악한 택배 노동 여건에 연휴에, 그것도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무거운 물건을 주문하는 것은 피해야만 하겠지만 그런 수준으로 스팸이 한국 음식이 되어 버린 것만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어쨌든 많은 양의 무거운 물건은 택배로 주문하지 말자). 실제로 스팸의 출생지인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우리가 스팸을 가장 많이 먹으며, 인지도도 코카콜라보다 앞선다.
스팸이 구호 물자로 쓰이며 자리를 잡았다고 했는데, 스팸의 역사는 193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육가공업체 호멜사에서 인기 없는 부위인 돼지 목심을 소모하기 위한 방편으로 개발했다. 호멜사는 당시 100달러의 상금을 걸고 사내 공모를 받아 이름을 지었고 진짜 의미는 당시의 임원 몇몇만 알고 있는 일종의 대외비라 주장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양념한 햄 (Spiced Ham)’의 줄임말이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통한다. 이런 스팸이 2차 세계대전에서 신선육의 대체품으로 군에 보급되었으며, 전쟁의 지속과 맞물려 미군의 주둔지였던 하와이와 괌, 오키나와 등지에 중요한 식료품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지역의 음식 문화에 흡수되었다. 스팸을 밥 위에 얹거나 사이에 끼워 김으로 싼, 하와이의 대표 음식 무스비가 현지화된 스팸의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에게는 스팸이 주로 밥반찬이다. ‘햄’이라고 일컫지만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사뭇 다르다. 가공육의 세계에서 햄은 완성품보다 부위, 즉 돼지의 넓적다리를 일컫는 명칭이다. 양념의 배합이 조금씩 다르지만 햄은 주로 통째로 소금에 절여 오랜 시간 매달아 말려 가공한다. 프로슈토(이탈리아), 하몽(스페인), 컨트리햄(미국)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그렇다면 스팸은? 재료는 확연히 다르지만 오히려 추억의 분홍 소시지에 더 가깝다. 고기와 비계, 즉 지방을 갈아 유화를 시킨 뒤 양념이나 결착제(덩어리가 잘 이루어지도록 더하는 첨가물, 스팸의 경우 해초에서 추출한 카라기난을 쓴다) 등을 더해 틀에 담아 익히는 동시에 모양도 완전히 잡는다. 스팸이 정확히 깡통 모양인 것도 재료를 갈아 만든 일종의 반죽을 채운 뒤 익혔기 때문이다. 이런 가공육을 갈아 틀에 넣었다고 해서 포스미트(forcemeat), 혹은 차갑게 먹는 육가공품이라는 의미에서 런치/런천 미트(lunch/luncheon meat)로도 분류한다.
실제로 같은 원리로 가공육을 만들면 스팸과 맛의 뿌리가 흡사한 음식이 나온다. 프랑스에서는 돼지고기와 지방을 갈아 틀에 채워 오븐에 삶듯 구운 테린이라는 음식이 있다. 원래 테린은 도기라는 뜻의 단어인데 간 고기(파테)를 채워 구웠다고 해서 파테 앙 테린(Pate en Terrien)이 정식 명칭이고 줄여 테린으로 자리를 잡았다. 가끔 돼지 목살 위주로 만들어 먹는데 영락없는 고급 스팸 맛이다. 스팸을 비롯한 포스미트류는 고기를 충분히 썼다는 전제 아래 대체로 부드러우니 질감의 차원에서 밥과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한편 맛의 측면에서는 모든 음식에서 바탕을 이루어 주는 탄수화물, 즉 밥의 단맛을 스팸의 짭짤함이 관통하며 조화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밥과 더불어 또 다른 한식의 붙박이인 김치가 신맛으로 전체의 균형을 잡아준다. 다만 밥-스팸-김치의 균형 잡힌 삼각관계는 잘 익어 신맛이 도드라지는 김치일 경우에만 제 몫을 한다.
흔하고 맛도 괜찮고 먹기도 편한 스팸. 하지만 의외의 걸림돌이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캔 내부에 완전히 밀착되어 담겨 있어 꺼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깡통에 담긴 채로 균일하게 썰어주는 도구 등이 종종 인터넷에 등장하는데, 스팸이 가공육치고도 부드러운 축에 속한다면 썬 다음 깡통에서 꺼내다가 부스러질 확률이 더 높다. 게다가 이런 도구는 스팸을 수직 방향으로 썰어주므로 질감의 잠재력을 완전히 살리지 못한다. 역시 제대로 즐기려면 온전히 캔에서 꺼내 칼로 써는 게 바람직하다. 다행스럽게도 잘 꺼내는 요령이 있다. 일단 뚜껑을 딴다. 그리고 한 손으로 스팸 캔을 들어 아래로 숙인 뒤 다른 손으로 얇은 나이프나 과도 등을 눕혀 캔과 스팸 사이에 넣은 뒤 지그시 누른다. 샴페인 마개를 딸 때처럼 공기 빠져나오는 소리가 나면 빠져나올 준비가 된 것이다. 나이프나 과도로 누른 상태에서 슬슬 잡아 빼면 스팸이 깡통에서 술술 빠져나온다. 만약 스팸이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면 깡통의 양 옆면(좁은 면)을 가볍게 압박하거나 나이프로 캔과 스팸 사이 전체를 한 번 가볍게 훑어준다.
갓 지은 밥 위에 갓 딴 스팸
미국 다음으로 많이 먹는다는 스팸인데, 굳이 잘 먹는 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까. 모든 내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과목이지만 시험을 앞두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오답 노트 한번 정리해 보듯 가볍게 짚어 보자. 무엇보다 스팸의 기본 가운데 기본의 새로운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보자. ’갓 지은 밥에 스팸’ 말이다.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르면 될 것 같지만 그 안에서도 나름의 서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스팸이 완전히 익은 상태로 팔린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한편 갓 지은 밥은 따뜻하다 못 해 뜨겁다. 그렇다면 스팸마저 굳이 뜨겁게 구워서 먹을 필요가 있을까? 뜨거운 밥과 캔에서 바로 꺼낸 스팸의 온도 대조는 의외다 싶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이러한 온도 대조가 미쉐린 별을 달고 있는 세계적인 레스토랑에서도 식사에 극적인 요소를 불어넣기 위해 쓰인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고민을 좀 덜고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노파심에 거듭 강조하지만 혹시라도 익히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라면 마음을 푹 놓아도 좋다.
한편 이런 시각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유의 맛을 분명히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간편함을 적극 활용하고자 스팸을 택할 가능성도 아주 크다. 캔만 따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썰고 또 굽는 과정 자체도, 또한 이후의 설거짓거리도 번거로워 스팸을 선택한 의미가 바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스팸이 많은 경우 전자레인지에 2~3분만 데워 갓 지은 밥 느낌을 내주는 즉석밥과 짝을 이룬다는 현실까지 감안한다면 팬을 불에 달구고 캔을 따고 도마에 올려 썰어 굽고… 이 모두가 쌓이면 결국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형국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익히지 않은 스팸을 한 번쯤 믿어보자. 신뢰도를 높이고자 설거짓거리를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요령도 덤으로 소개한다. 스팸을 딴 뒤 꺼내지 않고, 원하는 두께를 잡아 수직 방향으로 나이프를 집어 넣는다. 나이프의 끝이 캔의 바닥에 닿으면 양 옆으로 움직여 가장자리를 확실히 잘라내야 조각이 깨끗하게 떨어진다. 나이프를 빼 조각의 중간에 살짝 찔러 넣어 살살 들어 올린다. 이제 나이프로 한 쪽씩 들어 올려 먹으면 된다. 수직으로 썰어 먹으니 최선은 아니지만 도마 및 스팸을 담을 접시의 설거지까지 원천 봉쇄할 수 있다.
찬밥 해결사는 구운 스팸
그렇다면 구운 스팸은 먹지 말라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스팸을 구우면 질감이 달라지면서 사뭇 다른 음식의 느낌이 나는데 어찌 안 구워 먹을 수 있겠는가. 다만 정말 빛날 수 있는 맥락의 가능성을 검토해 보자는 것뿐이다. 고깃집의 공깃밥을 생각해보자. 갓 지은 것을 내놓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물론 맛보다는 관리의 편의를 좇는 설정이지만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격으로 이 또한 온도 대조의 극적 효과를 자아낸다. 미지근한 밥에 얹어 먹는, 갓 구워내 뜨거운 고기 말이다.
스팸도 가공’육’으로 엄연히 고기에 속하니 같은 원리를 적용해 먹을 수 있다. 팬 바닥에 한 켜 간신히 깔릴 정도로만 기름을 둘러 중불에 올려 달군다. 스팸은 1~1.5㎝ 두께로 두툼하게 썰어 올려 겉면을 노릇하게 지진다. 스테이크가 그렇듯 스팸도 두께를 넉넉히 줘야 겉과 속의 질감 차이가 생긴다. 어차피 익힌 것이므로 조리는 겉만 지진다는 느낌으로 최대한 짧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제 뜨겁지 않은 밥에 올려 즐긴다. 고깃집에서는 미지근한 밥을 내지만 사실 이런 설정이라면 밥이 아예 차가울 때 효과가 더 극적이다. 어느새 평소보다 더 많이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파심에서 잔소리 하나. 아니나 다를까, 오전에 재활용 쓰레기를 내다 버리면서 꽤 많은 스팸 캔을 발견했다. 연휴 직후이니 어찌 보면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대체로 뚜껑이 씌워진 채로 버려져 아쉬웠다. 깡통째로 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과연 그렇게 며칠 둘 정도로 아껴 먹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훌륭한 포장이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듯 뚜껑은 플라스틱이다. 따라서 재활용 쓰레기를 내다 버릴 때에는 반드시 분리해 따로 버리자. 한 번에 지나치게 많이 주문해 택배기사 고생시키지 않기와 더불어 스팸을 즐길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성숙한 시민의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