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판·유해한 내용 점검장치 전혀 없이 무법천지
저작권·프라이버시·공공성은 셀러에 책임 떠넘겨
아마존의 팽창세는 그칠 줄을 모르고 끝없이 뻐쳐 나가고 있다. 아마존이 패권을 이룬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가. ‘스탠포드 항균제 요법 가이드’(The Stanford Guide to Antimicrobial Therapy)는 박테리아 증상부터 감염된 상처에 이르기까지 각종 질병 치료를 안내해 주는 응급 처방 서적이다. 적당한 약은 무엇이고, 적절한 복용 용량은 얼마인지 등을 권고해 준다. 수많은 생명이 달려 있는 가이드북이다.
약물 권고 용량에 적혀 있는 숫자가 1인지 7인지 머리를 짜내야하는 그런 책이 아니다. 하지만 지난 2년 사이에 아마존 서점에는 수많은 해적판 유사 도서가 범람하고 있다. 인쇄도 조악해서 읽기조차 힘든 책도 많다. “환자들에게도 위험하고 우리 비즈니스 전체에도 위협이 되고 있다”고 가이드를 제작한 출판사의 스캇 켈리 부사장은 우려하고 있다.
켈리 부사장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아마존이 도서 유통업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아마존은 미국 전역에서 유통되는 책의 절반 이상을 판매하고 있다. 새책, 헌책을 막론하고 디지털 도서, 오디오 도서 할 것 없이 모두를 망라하고 있다. 게다가 아마존은 출판, 인쇄, 리뷰, 교과서 공급 및 배부 등을 모두 장악하는 플랫폼의 위치를 공고히 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존은 자기네 서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방관한채 손을 놓고 있다. 질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유통되는 책이 진짜인지, 전혀 점검도 하지 않는다. 자기네 사이트에 몰려드는 판매업자들을 감독도 하지 않는다.
그 결과로 일종의 무법천지가 벌어지고 있다.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의 세계적인 추리 소설 ‘오리엔탈 특급열차 살인사건’의 해적판이 무려 18개월 동안이나 아마존에서 버젓이 팔리기도 했다. 출판업자, 작가를 비롯해 작가노조 같은 단체들은 아마존에서 해적판 책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목소리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아마존은 아주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책을 산 사람이 불만을 제기한 경우에만 조치를 취한다. 출판사나 작가로서는 항의할 길도 없다. 이런 상황은 비단 도서 분야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다른 e커머스 상품에도 위조품이 거래되고 있다. 다만 도서 분야에서 이런 문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탈 특급열차 살인사건’도 해적판을 산 독자들이 여러 차례 신고를 했지만 별다른 조치없이 일년 반 동안 팔린 것이다.
빌 폴락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노스타치프레스’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의 회사가 출판한 컴퓨터 도서를 베낀 위조 책도 아마존에서 팔리고 있다. “시장을 장악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품질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거지요.” 베스트셀러를 요약한 책들도 아마존에서 팔리고 있다. ‘Bad Blood’는 요약본이 여덟 종류나 나돌고 있으며, 인기 소설 ‘Where the Crawdads Sing’은 요약본이 최소한 일곱 개나 아마존에서 유통되고 있다.
풀리처 상을 수상한 소설 ‘Less’의 위조본이 진짜처럼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저자 앤드류 션 그리어는 자신의 트위터에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분노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저자의 이름에서 스펠링을 살짝 바꿔서 나온 사기본도 나돈다.
‘Falling Through the Earth’를 쓴 다니엘라 트루소니가 피해를 본 당사자다. 로렌 그로프 역시 올해의 책 수상작 후보까지 오른 본인의 ‘Florida’의 불법 도서가 아마존에서 판매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요즘에는 기술 서적이 주요 타깃이 되고 있다. 첨단 하이텍 기술을 다루는 책의 경우 소설보다 가격이 비싸다. 그런 만큼 해적판 셀러들이 군침을 흘리는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마존 대변인은 해적판 도서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런 보고는 아주 소수의 불만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라도 많은 거지요. 제로가 될 때까지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아마존은 해적판 도서 유통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면서 지난해 100만 종의 위조 도서가 나돌았다는 지적을 부인했다.
아마존이 업계를 장악한 거인으로 등극한 이후 의회나 규제 당국은 독과점 여부에 대해 감시를 강화하고 있다. 연방하원은 이번달 아마존이 자유경쟁을 위반하는 행위를 했는지를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연방거래위원회 역시 아마존을 상대로 특별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폴락 사장의 ‘노스타치프레스’ 출판사도 3년 동안이나 컴퓨터 서적의 해적판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폴락 사장은 “페이스북, 유튜브 처럼 아마존도 유해한 유저들을 상대로 사후 처리 전략을 쓰고 있다”면서 그 덕분에 “아마존은 아주 거친 서부시대가 됐다”고 한탄했다.
아마존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게 일종의 비즈니스 모델이기도 하다. 잘 모르거나 게을러서 이렇게 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매출이나 순익을 아마존 스스로 줄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책 내용이 법이나 저작권, 프라이버시, 공공성, 트레이드마크 등의 권리를 위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장할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아마존은 출판사나 셀러에게 이렇게 밝히고 있다.
아마존은 지난 2월 ‘프로젝트 제로’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을 공개했다. 원본 출판사에게 전례없는 권한을 허용해 해적판이나 사기본 도서를 직접 통제하고 리스팅에서 제거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폴락 사장은 ‘프로젝트 제로’가 “더욱 모욕적인 조치”라고 비판했다. “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합니까? 해적판을 처리하는 것은 아마존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운영하는 ‘노스타치프레스’ 출판사는 아마존에 광고를 싣고 있다. 한 달에 3,000달러를 내고 있는데 광고비는 계속 오르고 있다.
‘스탠포드 항균제 요법 가이드’ 출판사의 켈리 부사장도 해적판 도서가 급증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우리 회사 매출의 15~25% 정도가 해적판에 잠식됐습니다. 수천 권에 달하는 분량이지요.” 아마존도 스캐닝을 하면서 해적판 일부를 구분해 내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쉽게 에러가 발생한다. 특히 핸드북 같은 소형 책자에서 자주 일어난다. 켈리 부사장은 통제 불능이라고 탄식했다.
아마존과 출판사와 아무런 직접적인 소통의 통로가 마련돼 있지 않다는 점도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의료기술인협회(AMT)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 봄 아마존에 벤더 사이트를 개설했다.
이를 통해 아마존은 고객이 어디에 거주하고 있으며 출판사가 어디로 배송을 해야 하는 지를 알려주게 된다. 켈리 부사장은 얼마 전 아마존에 편지를 보내 해적판 판매를 근절하기 위해 중간 단계를 없애고 홀세일 위치에서 역할을 감당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실상 아마존의 독점적 지배권을 포기하라는 소리다.
‘스탠포드 항균제 요법 가이드’ 는 해적판이 아마존에서 버젓이 판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