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위해 살다 간 '떠돌이' 문동환 목사
9일 별세한 문동환 목사는 스스로 '떠돌이 목자'라 불렀다. 고인은 목사이자 교육자, 신학자였고, 민주화운동가이자 정치인이기도 했다.
세상은 고인이 한곳에 머무르게 두지 않았지만, 어느 곳에서든 그는 민족과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떠돌이의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펼친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의 친동생으로 알려졌지만, 고인 역시 큰 족적을 남긴 한국 근·현대사의 증인이다.
고인은 명동촌에서 1921년 문재린 목사와 여성운동가 김신묵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CBS TV가 지난 1월 방송한 다큐멘터리 '북간도의 십자가'는 당시 북간도 출신 마지막 생존 인사였던 고인의 육성을 담았다. 고인은 "진지하게 살면 역사와 통하게 되고 예수님하고 교류하게 되는 경험을 가진다"며 "내가 영웅적으로 살았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역사가 나를 그렇게 끌고 갔다"고 했다.
어린 시절 말한 대로 목사가 된 고인은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에 뛰어들어 역사와 통하는 삶을 살았다. 1961년 한신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그는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다가 유신정권의 탄압으로 1975년 해직됐다. 해직 교수들과 함께 새로운 교회 운동을 펼치던 그는 생명문화 공동체 '새벽의 집'을 열었다. '나'보다 '우리'를 소중히 여기고 서로 나누고 섬기며 살겠다는 시도였다.
고인은 명동성당에서 긴급조치 철폐와 의회정치의 회복을 요구한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976년 김대중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구속됐다. 2년여간 수감생활을 하면서 고인은 명상기도와 성서를 통해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일반 죄수들의 비참한 현실에 눈뜨면서 민중신학의 실마리를 잡았다.
출옥 이후 '새벽의 집'은 민주화운동의 둥지가 됐다. 고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등 구속자 석방을 위한 농성과 시위를 벌였고, 1979년 동일방직 및 와이에이치(YH) 노조원의 투쟁을 지원하다 다시 투옥됐다. 그 해 10·26으로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대학으로 돌아갔지만,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해직됐다.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85년 한신대 교수로 복직한 고인은 198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고인은 1988년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하고 평화민주당 수석부총재까지 지냈지만 1992년 유학 시절 만난 미국인 아내 페이 핀치백(한국명 문혜림)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도 세계 현안과 한국의 현실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고, 말년까지 성서 연구와 집필에 매진했다. 고인은 2009년 자서전 '문동환 자서전 - 떠돌이 목자의 노래'를, 2012년 '바벨탑과 떠돌이'를 펴냈다. 90대 중반 나이에도 '예수냐, 바울이냐' (2015년), '두레방 여인들'(2017년) 등을 출간했다. 고인은 80대에 접어들면서 민중신학을 넘어 '떠돌이 신학'을 펼쳤다.
6.15공동행사 해외측 준비위 공동위원장이었던 고인이 2005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