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순례자의 교회'
2013년 첫 웨딩5년만에
비신자 절반… 외국인도
“오늘 결혼식이 풍성하고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결혼식이 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가족과 당사자들이 기쁨과 감동으로 충만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제주도 서쪽 끝자락인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에는 8㎡ 규모의 ‘초미니 예배당' 순례자의 교회가 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지난 8일 이 곳에서 황태철·임지은씨의 결혼식이 열렸다. 이들 부부는 교회당 봉헌 이듬해인 2013년 1월25일 이 교회 첫 웨딩마치 이후 여기서 결혼한 100번째 커플이다.
이날 결혼식은 신랑·신부와 가족 등 10명에 사진작가, 주례인 순례자의 교회 담임 김태헌 목사까지 총 12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비좁은 공간에서 소박하게 치러졌지만 화촉점화, 예물 교환, 주례사, 기도, 양가 부모에 인사, 기념촬영까지 결혼식 과정이 빠짐없이 이뤄졌다.
신혼 부부는 서로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결혼식을 치르고 싶어서 이곳에서 결혼하기로 했다. 신부 임씨는 “웨딩홀에서 하는 결혼식은 사람이 많고 번잡해 정작 주인공인 신랑·신부에게 집중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의미 있는 결혼식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신부 어머니도 “큰딸 결혼식을 치를 때 너무 정신이 없었는데, 이번에 둘째 결혼식은 부부를 축복하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며 “사돈댁에서도 허례허식을 싫어하셔서 양가의 의견이 맞았다"고 말했다.
이날로 100번째 주례에 나선 김태헌 목사는 “순례자의 교회가 검소한 결혼식의 메카가 된 것 같다"며 “허례허식으로 치장돼 비용이 많이 들고, 가벼운 이벤트가 되는 결혼식이 아닌 진정한 결혼의 의미를 찾는 자리가 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곳은 기독교인가 아닌 이들에게도 열려있다. 김 목사에 따르면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린 부부 중 신랑·신부 모두 비신자인 경우가 절반가량 된다. 부부 중 한쪽이 중국, 일본, 벨기에, 폴란드 등 외국인인 경우도 있었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와서 결혼식을 올리고서 몇년 뒤 제주에 이주한 부부도 있었다.
양가 부모나 증인도 없이 신랑·신부 둘이서 결혼식을 할 때 교회를 구경하러 온 여행객들이 즉석에서 결혼식 증인이나 하객으로 섭외되기도 한다. 성악을 전공한 여행객이 교회를 들렀다가 결혼식을 보고 현장에서 즉석에서 축가를 불러준 일도 있었다.
사진작가를 섭외하지 않고 신랑·신부가 직접 사진을 찍기로 했는데 갖고 온 디지털카메라가 방전돼 애를 먹기도 했다. 결국 김 목사가 주례하면서 사진을 찍고 ‘셀카'로 셋이서 기념사진을 찍은 일도 있다.
하지만 자녀가 이곳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해도 부모가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김 목사는 이곳에서 결혼한 부부들에게 종종 문자메시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이들의 미래를 축복하는 기도를 한다. 그는 “제 역할은 부부가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돕고, 행복을 향한 여정의 시작을 축복해주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결혼식을 올리려는 부부들을 위해 기꺼이 주례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유정원 종교전문 기자>
제주시에 위치한 ‘초미니 교회’ 순례자의 교회(사진 위)에서 열린 100번째 결혼식에서 김태헌 목사가 주례를 서고 있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