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한국 38년(2) : 일제와 진주만 폭격
내고향 가월리는 시골 산골 인데도 장작불에 쌀밥에 전깃불까지 켜고 사는 별천지 였다. 원인은 적성 농장이 생긴 때문이다. 농장이 생기기 전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피삼죽으로 연명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황해도 해주 갑부인 어머니 6촌 오빠가 임진강 절벽 위 갈대가 무성한 황무지를 개간해 농장으로 만들었고 개성에서 전기를 끌어다가 대형 발전기로 임진강 물을 퍼 올렸다.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이 적성 농장이고 그로 인해 가월리와 주월리 두 마을은 전기불까지 켜고 사는 특별한 농촌 산골 마을로 변했다.
아버지는 물 관리와 추수 관리 감독 책임자가 됐고 서울 갑부 새 농장 사장의 신임과 능력을 인정 받아 좋은 농지도 많이 배당 받게 돼 부농의 위치로 격상하게 됐다. 그 후 집을 크게 신축한 후 태어난 나는 고생을 모르고 자랐다. 그래도 시골 농부의 아들인 나는 바지 저고리에 짚신을 신고 여름이면 맨발로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부러울 것 없이 신나게 아이들과 뛰어 놀았다. 일제가 동네 청년들을 징병으로 끌고 가고 어린 누나들이 위안부로 끌려 가도 왜 어디로 가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희희낙낙 했다.
아버지는 4남매중 차남이였고 할아버지는 을사늑약 직전 서울에서 고향 가월리로 낙향한 후 가정을 외면한 채 말을 타고 각 고을을 떠돌며 시를 쓰고 읊으며 살았기 때문에 집안 살림은 가난이 찌들대로 찌들었다. 게다가 형님인 큰아버지는 조선 팔도와 만주 일대를 누비고 다닌 건달이였고 동생인 작은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 가버려 할 수없이 아버지가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다.
나는 할아버지를 모른다.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 온 큰아버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단칸방 오막사리로 분가시켰다. 밥 솥 하나와 밥그릇 둘과 수저 두개만 들고 새 살림을 시작했던 기막힌 사연을 긴 겨울밤 화롯불 앞에서 어머니가 내 바지 저고리를 만들면서 피 눈물 낳던 가시 밭길을 애기 했지만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무심하게 아이들 하고 뛰놀 생각만 한 철부지였다.
1942년 일제시엔 시골 적성면 전체에 국민학교가 하나 뿐이였다. 그 때문에 20리 30리 먼 곳에서 걸어 오는 학생들과 임진강을 건너 오는 학생들도 많았다. 신사 참배가 끝나고 첫 수업 도중 학교 종이 요란하게 울려 퍼져 학생들은 급히 영문도 모르고 운동장으로 뛰쳐 나갔다. 학생들이 줄을 서고 정돈을 끝내자 교단 위에 오른 '다케나리' 일본 교장 선생이 마치 개선 장군처럼 학생들을 지켜 본 다음 “어제 대 일본제국 해군 장병들이 하와이 진주만 미 해군 기지와 함정과 항공기를 격파하고 완전히 초토화 시킨 대 승전보를 전하는 바이다. 그리고 일본 제국의 역사적인 승리를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천황폐하께서는 특별히 학생 제군들에게 모찌 ( 찹쌀떡 )을 하사 하셨다. 제군들은 위대한 천황폐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대 일본 제국 해군의 승리를 찬양하고 축하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수업을 중단하고 경축 휴일로 정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