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초청, “내게로 오라!”(Come to me)는 우리의 영혼에게 쉼을 주시기 위한 목적입니다. 우리의 지치고 피곤한 영혼을 향하신 예수님의 초청은 우리의 당면한 문제와의 만남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우리 영혼에게 쉼과 만남을 통하여 예수님과의 동행으로 이끄심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과의 동행으로 이끄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으로 일관합니다. 예수님과의 '동행'(cf. 창Gen. 5:21-31)은 곧, ‘예수신앙이란 무엇인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동행’이란 말로써 제일 먼저 소개된 사람이 에녹입니다. 에녹이란 사람은 창5장에 보면,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돼있습니다(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이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동행의 관점에서 2017년도를 맞이하고 1월에서 현재까지 지난 「6개월」동안,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했나?’ 가장 가까운 ‘어제 하루만 볼 때,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는가?’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동행의 조건은 '만남'입니다. 예수님의 증인된 바울은 전에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지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시며 찾아오신 예수님과 사울의 만남, 그 만남이 사울을 변화시킵니다. 그는 생애를 걸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대사도가 되어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는 그날까지 예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만남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과의 만남을 회심, 구원, 또는 칭의라고 합니다. 진지한 의미에서 나의 신앙여정에서 '내게 구원이 있었는가? 회심이 있었는가?’ 따져봐야 합니다. 한평생 동행하면서 그분을 닮아가는 과정, 그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신자들중에는 명목상의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진지하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만나야 동행이 가능합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만나셨습니까?" 이것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참고로 동행은 (1) 목적이 같아야 합니다. (2) 행선지가 같아야 합니다. (3) 뜻이 같아야 합니다. 둘째, 동행의 방법은 '소통'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금실이 좋은 부부가 될 수 있는 것도 서로간의 소통이 잘돼야 합니다. 이처럼 소통이 잘되려면 대화가 일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안하신 방법이 '멍에(Yoke)'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멍에는 원래가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메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 쪽은 예수님이시고 다른 한 쪽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멍에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 대신 멍에를 져 주심으로 우리의 멍에가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전에 직업이 목수입니다. 그래서,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 최고인기 멍에의 브랜드는 “Made in Jesus”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멍에는 딱 맞아야 소에게 상처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솜씨는 소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너무나 잘 맞게 만드셨기에 “내 멍에는 쉽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짐이 가볍다”고 말씀하신 것은 짐 그 자체가 가벼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으로 인하여 그 짐은 가벼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그 어떤 희생을 치른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사람입니다.
셋째, 동행의 축복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동행하는 '대상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입니다. 이때의 짐은 바로 우리의 「죄」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비유하여 “고난의 종”에 비유합니다. 이 고난의 종을 예언한 선지자가 있는데 그 분은 바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것을 700년 전에 예언한 ‘대선지자 이사야’입니다. 이사야 42장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입술을 통하여 우리를 이렇게 비유하십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Isaiah 42:3)"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것은 인생의 약함 때문입니다. 상한 갈대는 꺾어지기 쉽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은 쉽게 꺼질 수 있습니다. 조금의 충격도 견디지 못하여 꺾일 수 있는 『상한 갈대』, 약간의 바람에도 꺼지기 쉬운 『꺼져가는 등불』. 이것이 바로 우리영혼의 본 모습, 우리 인간의 실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우리를 위해 대신 멍에를 져 주시고, 대신 짐을 져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우리의 영원한 동행자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짐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행의 축복입니다. 동행의 축복을 받은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시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동행자의 축복은 바로 이 겸손과 온유의 예수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인생의 해가 거듭될수록 「지난 세월의 오류」, 「잘못된 과거의 전철」을 다시는 밟지 않기 위해서는, 「확고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을 붙드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쉼과 만남과 동행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크리스천의 천로역정입니다. 무거운 죄의 짐은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면서 잘못된 과거의 연속이 아닌 확고한 결단으로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며 매일 매일을 점진적인 구원의 행진에 동행의 걸음을 내 딛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