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전쟁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독립전쟁은 사람들의 마음과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 존 애덤스 전대통령, 1818.
미국 독립전쟁의 역사는 1775년에 최초의 총성이 올리기 훨씬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영국과 아메리카는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최초의 영구적인 정착촌이 건설된지 1세기 반이 더 지난 1763년에 이르러서야 분명히 갈라서기 시작했다. 이때쯤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경제력과 문화적 성취가 놀라우리만큼 증대하여, 거의 모든 식민지가 자치를 실시한지 이미 오래였다. 1760년대에 아메리카 식민지의 총인구는 150만을 넘어섰는데, 이는 1700년 이래로 6배로 늘어난 숫자이다.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끝나고나서 영국은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구도가 필요했으나 아메리카의 정세는 전혀 변화를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일을 독립적으로 처리하는데 익숙해진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이제 프랑스의 위협이 제거된 마당에 더욱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게 되었다. 영국의회는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고, 아메리카에 대한 통제를 더 엄격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치에 길들어 있고, 간섭을 마다하는 식민지 사람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영국이 먼저 시도한 일의 하나는 내부를 잘 '조직'하는 일이었다.
캐나다와 그리고 오하이오江 유역의 정복은 프랑스인 주민과 인디안을 소외시키지 않는 정책을 필요로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데 있어 영국 당국은 아메리카 식민지와 이해가 충돌했다.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 정착민을 위한 보다 많은 땅이 필요하게 된 식민지들은 자기들의 경계선을 서쪽으로 미시시피강까지 확대할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영국정부는 새로운 땅을 찾아 이동해가는 정착민들이 인디언들과의 전쟁을 유발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에게 토지를 좀더 천천히 내어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정착민의 이동을 제한하는 것은 또한 새로운 정착지를 허용하기 전에 기존 정착지에 대한 영국정부의 통제를 확실케 할 수 있는 한 방법이기도 했다.
1763년의 '영국왕 포고령'은 앨리게이니 산맥, 플로리다, 미시시피강 및 쾌백 사이의 모든 서부 영토를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위해 따로 보존해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왕은 서부영토에 대한 아메리카 식민지 13주의 모든 권리 주장을 일소하려고 들었다. 이 왕령은 효과적으로 실시되지 않았지만 식민지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자기들이 서부의 땅을 점거하여 정착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고압적으로 무시해버리는 처사로 보였다. 식민지 사람들의 반발을 자아낸 일들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인즉, 판도가 늘어나는 제국을 뒷받침하기 위해 돈이 더 필요하게 된 영국정부의 재정정책이었다.
영국의 납세자들이 식민지를 지키기 위한 돈을 공급하지 않을 경우 그 돈은 보다 강력한 중앙 통제의 행정을 통해서 식민지 사람들로부터 짜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새로운 제도를 개시하는데 있어서 제 1단계는 영국 의회의 지역으로부터 수입되는 럼주와 당밀에 대하여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던 1733년의 '당밀조례'를 1764년의 '설탕조례'로 대치하는 일이었다. 이 법은 럼주의 수입을 금하고, 모든 곳으로부터 나오는 당밀에 가벼운 세금을 부과하고, 포도주, 비단, 커피 그리고 몇 가지 사치품에 대해 조세를 부과토록 하는 것이었다. 당밀에 대한 세금을 낮추면 뉴잉글랜드의 럼주 양조장에서 사용하기 위한 당밀을 네덜란드영 및 프랑스영 서인도제도로부터 밀수입해올 유혹을 줄일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였다. '설탕조례'를 실시하기 위해서 세관 관리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보다 효율적으로 근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아메리카 해군의 영국 군함들에게는 밀수업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검열영장'의 발급으로 영국왕의 관리가 의심스러운 곳을 수색할 수 있게 했다. '설탕조례'로 부과되는 관세와 이를 실시하기 위한 조치는 뉴잉글랜드의 상인들을 경악케했다. 그들은 소액의 관세만을 지불한다 해도 자기들의 사업이 방해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상인, 입법기관 및 읍회가 일어서서 이 법에 항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