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를 통해 항공권을 구매하고 증권 회사를 통해 주식을 매매하는 행위는 이제 좀처럼 보기 힘들어졌다. 브로커로 불리는 중간 업자를 거치면 수수료를 지급해야 하는데 인터넷을 통해 수수료 지급 없이 소비자나 투자자가 직접 거래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동산 시장에서는 아직도 부동산 에이전트를 통해 주택을 매매하고 수수료를 지급하는 관행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런데 몇 년 전 부동산 수수료 부과 방식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하는 셀러의 집단 소송이 제기된 바 있다. 최근 집단 소송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나왔는데 앞으로 부동산 수수료 지급 체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셀러에게 높은 수수료 부담 지우는 관행 철퇴 맞아
이번 평결로 수수료 인하 등 즉각적인 효과는 없을 것
◇ 배심원단 1억8천만달러 배상 평결
지난달 31일 미주리주 연방법원 배심원단은 ‘전국부동산중개인협회’(NAR)와 홈서비스오브아메리카, 켈러 윌리엄스 등 대형 부동산 중개 업체가 공모해 부동산 중개 수수료를 인위적으로 부풀린 혐의가 반독점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약 50만 명의 셀러에게 약 18억 달러의 손해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평결을 내렸다.
이번 평결에서는 제외됐지만 2020년 제기된 집단 소송 피고 측이었던 리맥스와 애니웨어 리얼 에스테이트 등은 법정 밖 합의를 통해 총 1억 4,000만 달러를 원고 측에 지급하기로 이미 합의했다. 애니웨어 리얼 에스테이트는 센츄리21, 콜드웰뱅커, 소더비 인터내셔널 리얼티, 코코란 등 대형 부동산 중개 프랜차이즈 업체의 모회사다.
리맥스와 애니웨어 리얼 에스테이트는 합의금 지급 외에도 소속 에이전트에게 NAR 가입을 강요하지 않을 것 등을 포함한 기존 비즈니스 관행을 수정할 것 등도 약속했다. NAR는 부동산 업계를 대변하는 이익 단체로 부동산 브로커와 에이전트 등이 지켜야 할 수칙 등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다.
NAR과 홈서비스오브아메리카, 켈러 윌리엄스는 이번 손해 배상금 지급 평결이 나온 직후 항소할 계획을 밝혀 당장 중개 수수료가 인하되거나 하는 등의 변화는 없을 전망이다. 맨틸 윌리엄스 NAR 부대표는 “이번 배심원단 평결이 소송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항소를 통해 법원에 손해 배상금 조정 등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CNN과의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 수수료 부풀린 점 반독점법 위반
부동산 중개 수수료를 둘러싼 집단 소송의 시작은 약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오래전부터 관행적인 부동산 수수료 지급 방식이 공정 거래를 헤친다는 지적이 있었던 가운데 2020년 부동산 중개 수수료 지급 방식의 문제점을 제기한 집단 소송이 셀러들에 의해 제기됐다. 당시 원고 측은 NAR과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지역 MLS 20곳, 대형 부동산 중개 프랜차이즈 업체 ‘리알로지’(Realogy•현 애니웨어 리얼 에스테이트), ‘홈 서비스 오브 아메리카’(Home Services of America), 리맥스, 켈러 윌리엄스 리얼티 등을 상대로 셀러에게 부풀려진 수수료를 지급하도록 공모한 점이 연방 반독점법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 측이 주장하는 소송의 쟁점은 MLS 시스템에 참여하는 브로커에게 바이어 측 브로커 수수료로 조정 불가능한 확정 금액을 제시하도록 요구한 NAR의 ‘바이어 브로커 수수료 규정’(Buyer Broker Commission Rule)이다. 이 규정으로 인해 셀러는 부풀려진 수수료를 지급하도록 강요받는데 셀러가 지급하는 수수료를 리스팅 에이전트와 바이어 에이전트가 분배하는 행위 역시 불공정하다는 주장이다.
일반적으로 리스팅 계약 조건으로 셀러는 리스팅 브로커에게 일정 수수료를 지급해야 한다. 지난 수십 년간 부동산 매매 가격의 4~6%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셀러가 지급해 왔고 총수수료의 절반에 해당하는 2~3%를 리스팅 에이전트와 바이어 에이전트가 분배하는 관행이 이어져 왔다.
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셀러들은 요즘처럼 구입 경쟁이 과열된 시기에는 바이어 에이전트 수수료는 바이어가 지급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소송을 통해 주장했다. 바이어가 바이어 에이전트와 협상을 통해 수수료 금액을 합의하고 셀러는 바이어 에이전트 수수료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 외에도 원고 측은 전통적인 수수료 지급 방식에 크게 두 가지의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됐다. 첫째 대개 바이어 측 브로커는 총수수료의 절반을 지급받기 때문에 더 높은 수수료 금액이 제시된 매물만 골라서 바이어에게 권유하도록 유도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브로커의 업무 규모나 방식과 상관없이 이미 정해진 비율의 수수료가 지급되기 때문에 셀러가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 업계, ‘바이어가 수수료 내면 구입비 커질 것’
NAR와 피고 측 부동산 중개 업체는 수수료 금액은 정해진 금액이 아니라 합의를 통해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쳐왔다. 또 리스팅 에이전트로 하여금 바이어 에이전트와 수수료를 분배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바이어의 주택 구입비 부담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도 강조했다. 바이어가 주택 구입에 필요한 다운페이먼트, 클로징 비용, 인스펙션 비용, 감정 수수료 등의 비용 외에 수수료까지 부담하면 주택 구입비 부담이 너무 높아져 주택 거래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것이 피고 측 주장의 핵심이다.
부동산 업계도 이번 평결로 인한 즉각적인 영향을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총 수수료 금액에는 큰 변화가 없고 장기적으로 리스팅 에이전트 수수료는 셀러가, 바이어 에이전트 수수료는 바이어가 각각 부담하는 방식으로 부동산 수수료 체계가 변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일반적으로 수수료 금액이 리스팅 가격에 반영되기 때문에 셀러가 부담하는 수수료가 낮아지면 리스팅 가격도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부동산 중개 업체 켈러 윌리엄스의 젠 데이비스 에이전트는 “부동산 중개 수수료와 관련해 단기간 내에 크게 바뀌는 것은 없고 금액도 지난 수십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셀러와 리스팅 에이전트 간 합의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며 “만약 바이어가 수수료를 부담해야 한다면 주택 구입비 부담이 크게 높아져 주택 거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다.
<준 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