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자의 역사
오늘은 몇몇 대표 과자를 중심으로 한국 과자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과자의 양대 기본 재료인 설탕과 밀가루는 아무래도 일제 강점기 시절 본격적인 대량 생산이 이뤄졌다. 설탕은 1922년 대일본제당이 평양에, 밀가루는 1919년 만주제분회사가 평양과 진남포에 공장을 설립한 이후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한편 서양식 과자는 고종 21년(1884)에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손택이 정동구락부를 통해 양식을 소개하면서 도입됐다. 1920년대 초에 한반도 최초의 양과자점이 문을 열었으며, 광복 이전까지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공장이 10개소 운영됐다.
밀가루와 설탕의 대량 공급을 바탕으로 1934년부터 일본인 소유의 제과공장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때 풍국제과, 영강제과, 경성제과, 조선제과, 장곡제과, 대서제과, 궁본제과, 기린제과 등의 제조업체가 등장해 한국 과자 산업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후 해방을 맞이하면서 영강제과가 해태제과(1945년)로, 풍국제과가 동양제과(1956년)로 변모해 오늘날까지 성업 중이다. 1945년 일본인이 버리고 간 설비로 창업해 한국 최초의 제과업체라 할 수 있는 해태제과는 과자, 사탕, 껌, 초콜릿 네 부문에서 최초의 제품을 출시했다.
이 가운데 한국 최초의 과자라 할 수 있는 제품은 1945년의 연양갱이다. 극장에서 팔렸던 양갱을 제품화한 연양갱은 불릴 연(煉)자를 쓰는데, 사실 일본의 ‘네리요캉(煉羊羹)’을 그대로 읽은 것이다. 이렇게 양갱으로 출범한 해태제과는 1946년 해태 ‘캬라멜’, 1956년 해태 풍선껌을 각각 출시한다.
최초의 캐러멜과 껌을 출시한 해태제과이지만 현재 주도권은 다른 업체가 쥐고 있다. 캐러멜의 경우 동양제과의 오리온 ‘밀크캬라멜’이 1979년 등장해 시장을 휘어잡은 이후 오늘날까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밀크캬라멜’은 2015년 제품명을 ‘오리온카라멜’로 바꾸고 질감과 맛을 개선시켰다.
한편 껌은 이제 롯데제과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롯데는 1967년 한국롯데를 설립하면서 쿨민트껌, 바브민트껌, 주시민트껌, 슈퍼맨풍선껌, 오렌지볼껌 등 6종의 제품을 출시했다.
이후 롯데껌의 대표 제품 3총사로 자리 잡은 쥬시후레쉬, 후레시민트, 스피아민트와 향기를 강조한 이브껌이 1972년에 출시되었다. 1980년대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진 기능성 껌은 1994년 해태의 덴티큐, 2000년 롯데의 자일리톨을 통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현재는 롯데가 자일리톨을 통해 시장의 70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
대량 생산 과자류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스낵류라면 농심의 새우깡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71년 출시된 새우깡은 여러모로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대부분의 과자를 기름에 튀겨 만들었던 시절, 가열된 소금 위에서 굽는 ‘파칭’ 공법을 활용해 제조했다.
‘손이 가요 손이 가/새우깡에 손이 가요/아이 손/어른 손/자꾸만 손이 가’의 CM송(1988년, 이만재 작사 윤형주 작곡)으로도 유명한 새우깡의 진짜 비밀은 이름이다. 당시 농심 신춘호 회장의 어린 딸이 아리랑을 ‘아리깡~ 아리깡~ 아라리요’라고 잘못 부른 데서 한 번 들으면 절대 잊히지 않는 새우깡의 이름이 탄생했다.
짠맛 스낵의 대표로 새우깡을 꼽는다면 단맛 스낵으로는 맛동산이 있다. ‘맛동산 먹고 즐거운 파티’라는 구절로 유명한 CM송이 따라붙는 것도 비슷한 가운데, 사실 맛동산은 이름 때문에 나름 고난을 겪었다. 1975년 처음 출시되었을 때 맛동산의 원래 이름은 ‘맛보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상적이지 않은 이름이 판매에도 영향을 미쳐 맛보다는 시판 6개월 만에 단종됐다.
하지만 과자의 잠재력을 포기하지 않은 해태제과는 소비자 설문 조사를 실시했고, 그해 12월 ‘온갖 고소한 맛이 모여 있다’는 뜻의 ‘맛동산’으로 개명해 재출시했다. 자칫 이름 탓에 여태껏 인기를 누리는 장수과자가 단명할 뻔했다.
한편 CM송 이야기를 하자면 초코파이를 빼놓을 수 없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눈빛만 보아도 알아/마음속에 있다는 것’의 서정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CM송은 1989년 등장했지만 초코파이의 역사는 197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출장길에 동양제과의 당시 김용찬 개발실장(1990년 퇴사)이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문파이(Moon Pie)’를 먹고 착안 및 개발해 1974년에 출시했다. 1917년 4월 29일 처음 발매되었으니 문파이의 역사는 백 년도 넘는다. 개발자인 얼 미첼 주니어에 의하면 아버지가 켄터키주의 광부들 이야기를 들은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그레이엄 크래커 사이에 마시멜로를 끼워 만든 간식’을 먹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그레이엄 크래커 사이에 마시멜로를 끼우고 전체에 초콜릿을 입힌 문파이가 탄생했다. 문파이는 통밀가루의 일종인 그레이엄 크래커로 만들어 초코파이보다 훨씬 더 뻑뻑하다.
초코파이 같은 과자류를 업계에서는 비스킷으로 분류하는데, 또 다른 대표 제품으로 산도가 있다. 1999년 드라마 ‘국희’의 주요 소재로 활용되면서 시장에서 뜨거운 인기를 얻은 산도는 1956년 ‘크라운 소프트 산도’라는 품명으로 출시됐다. 제조업체인 크라운제과는 영일당으로 1956년 상호를 바꾼 뒤 5년 만에 산도를 출시했다.
창업주인 고 윤태현 회장이 순수 우리 기술로 개발한 제품으로, 변변한 국내 기술이 없는 현실 속에서 터널식 오븐, 비스킷 사이에 크림을 채우는 샌딩 머신 등을 개발한 끝에 산도가 생산될 수 있었다. 과자의 표면에 상표와 마크를 양각으로 새기는 시도도 산도가 처음이었다.
당시에는 귀했던 밀가루와 우유, 버터 같은 고급 재료를 써 만든지라 산도는 출시와 함께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워낙 인기가 높아 양쪽의 비스킷을 좌우로 돌려 떼어낸 뒤 크림을 혀로 핥아먹는 유행을 정착시킨 한편, 미군도 본토 보급품의 비스킷보다 산도를 더 선호했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매년 2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산도는 원래 사각형이었으나 1981년 4월 원형으로 변경 출시되었다. 1993년 일본식 표기인 ‘산도’를 ‘샌드’로 고치는 시도도 했으나 소비자는 물론 슈퍼마켓 점주가 요청해 1996년 다시 ‘크라운 산도’로 품명을 되돌렸다. 한편 드라마 ‘국희’에 등장했던 땅콩샌드는 ‘국희샌드’라는 이름으로 출시돼 아직까지 잘 팔리고 있다.
비스킷과 스낵의 중간 형태인 ‘복합 제품’의 대표로는 홈런볼을 꼽을 수 있다. 1981년 출시되었으나 올해로 41살인 홈런볼은 이름답게 야구장에서 가장 즐겨 먹는 과자로 자리를 잡았다.
KT위즈 홈구장의 매점 통계에 의하면 2~5위를 전부 합친 것보다도 많은 판매량을 자랑한다고. 홈런볼은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한 디저트 프로피테롤(profiterole)에서 영감을 얻어 동글동글한 슈에 초콜릿을 채운 과자이다.
2021년까지 30억 봉지, 1조7,500억 원의 누적 판매를 기록했다. 국민 1인당 60봉지 꼴이고 전국 프로야구 경기장 9곡을 펜스 높이까지 5번 넘게 채울 수 있는 양이다. 섭씨 180도 에어프라이어에서 3분간 돌리면 슈는 바삭해지고 초콜릿은 녹아 한결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다.
마지막으로 초콜릿의 역사를 살펴보자. 초콜릿의 유입과 관련된 설은 두 갈래이다. 앞서 언급했던 정동구락부의 독일인 통역사 손탁이 고종황제에게, 러시아 외교관의 부인이 명성황후에게 화장품과 함께 진상했다는 설이다. 어느 쪽을 정설로 꼽더라도 구한말 고종황제의 아관파천을 중심으로 초콜릿이 국내에 유입되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없다. 일반인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을 통해 초콜릿을 처음 접할 수 있었는데, 원래 초콜릿의 역사가 그렇듯 유입 초기에는 귀중품 대접을 받았다.
최초의 초콜릿은 역시 해태제과의 몫으로 1967년의 나하나 초콜릿이다. 이후 1968년 동양제과에서 넘버원을, 1975년 롯데에서 가나초콜릿을 출시했다. 초콜릿 가공 과자로서 가장 큰 인기를 누리는 빼빼로는 1983년 롯데제과에서 출시되었는데, 1966년 출시된 일본 글리코사의 과자 포키를 이름만 바꿔 국내에 내놓은 제품이었다. 글리코는 2015년 미국에서 상표권 침해 소송을 걸었으나 6년 만인 2021년 최종 패소 판결을 받았다.
초콜릿을 입힌 막대 과자라는 디자인의 기능성을 감안할 때 보편적으로 활용 가능하다는 유권 해석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