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말, 핼러윈이 코앞이다. 핼러윈 이야기를 꺼내자니 반감을 예상한다. 고유의 명절도 아니고 상업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크리스마스도 우리 고유의 명절은 아니건만 케이크는 불티나게 팔리니 상업적인 분위기가 아닐 수 없다. 밸런타인데이나 심지어 빼빼로데이 같은 날들은 또 어떤가? 즐기자는 취지는 결국 소비로 연결된다. 핼러윈도 이런 날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명절도 아니고 주말이니 사실은 큰 부담이 없다. 어차피 빡빡한 현대인의 삶에서 하루 즐길 거리가 있다면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번 화에는 다가오는 핼러윈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는 기회를 갖기로 했다. 어떻게 해서 음식, 즉 사탕이나 초콜릿 등과 관계 있는 축제의 날이 되었는지 살펴볼 좋은 기회이다.
천국도 지옥도 못 간 잭 영감이
악마가 준 불덩이로 만든 등불
야경꾼^도깨비불 상징하는 설화
모든 성인의 날‘만성절’전야제
기독교^켈트문화 섞이며 생겨나
핼러윈(Halloween)은 만성절(萬聖節), 즉 ‘모든 성인의 날’의 전야를 의미하는 ‘올 핼러우스 이브(All Hallows’ Eve)’의 줄임말이다. 어원만 놓고 보면 핼러윈은 그리스도교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교에서는 4세기 무렵부터 만성절을 기려왔다. 명칭 자체가 말해주듯 ‘모든 성인의 날’은 축일이 제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특별히 기리는 날로 서기 800년께 일자가 11월 1일로 고정됐다. 그 만성절 전야의 축제가 바로 핼러윈이다.
하지만 핼러윈이 그리스도교의 영향만 오롯이 받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핼러윈 풍습은 켈트어를 썼던 문화권의 민속신앙 및 풍습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의 민속학자 잭 산티노는 핼러윈이 아일랜드에서 민속신앙과 그리스도교의 공존을 모색하는 가운데 발생 및 정착했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핼러윈은 게일, 즉 스코틀랜드 켈트어를 쓰는 문화권의 축제인 사윈(Samhain)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정설로 알려져 있다. 켈트인들은 한 해가 열 달로 이루어진 달력을 쓰는데 네 개의 기념일(Quarter Days)를 지정해 절기를 구분했다. 그런 가운데 한 해의 마지막과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10월 31일의 사윈 축제를 가장 중요한 날로 여겼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만 섬에서 쇠는 사윈은 ‘겨울의 첫날’이라는 의미로 좀 더 음침하고 어두운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 특히 현세와 이 세계의 경계선이 흐려짐으로써 요정이나 정령이 활발하게 활동해 현세로 넘어온다는 믿음을 품었다. 요정이나 정령은 사람과 가축이 겨울을 버텨낼 수 있도록 안심시켜주는 역할을 맡는다고 믿었으므로 켈트인들은 조공을 마련해 이들을 섬겼다. 같은 맥락에서 가족을 찾아오는 망자들을 위해 한국의 차례처럼 음식을 차리는 문화도 존재했다.
축제였으므로 살아 있는 이들은 마음껏 먹고 마신 다음 놀이를 즐겼다. 놀이는 대체로 죽음 및 결혼에 관한 각자의 운명을 점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사과를 물이 담긴 대야에 담아 이로 물어 건져내는 사과 건지기(apple bobbling)이나 견과류 굽기, 거울점 치기, 녹인 납이나 계란을 물에 부어 형상을 읽기, 꿈 해석 등이 사윈 축제의 놀이였다. 한편 망자들의 영혼이 현세를 방문했다가 돌아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모닥불을 피우는 것 또한 당시의 풍습이었다.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이런 사윈의 풍습에 ‘머밍(mumming)’ 혹은 ‘가이징(guising)’이라 불리는 놀이가 추가되었다. 머밍 혹은 가이징은 사람들이 의상이나 가면을 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노래나 싯구를 읊는 대가로 음식을 요구하는 놀이로 요즘 핼러윈의 ‘사탕 아니면 골탕!’과 형식이 흡사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만 섬과 웨일스 지방에서 흥했던 머밍 혹은 가이징은 죽은 이의 영혼처럼 분장하고 이들을 위한 음식을 받아 먹는 ‘소울링(souling)’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었다. 분장을 통해 영혼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믿음이 근간이었다.
핼러윈의 대명사로 자리를 굳힌 잭오랜턴은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가 기원인데, 원래 순무를 깎아 만들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토착 식물이면서도 좀 더 부드러워 다루기 쉽고 커서 극적인 효과가 잘 드러나는 호박을 쓰게 되면서 오늘날의 형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최초의 호박 조각 기록은 183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원래는 보편적인 추수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 19세기 중반 및 후반에 이르러서야 헬러윈의 풍습으로 안착했다.
잭오랜턴은 망령을 위해 불을 밝혀주는 등인데, 기원설로는 아일랜드의 민담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욕심 많은 구두쇠 영감 잭이 길을 가다가 악마를 만났다. 악마가 자꾸만 뒤를 따라오자 잭 영감은 꾀를 내어 사과를 권했고, 악마가 사과나무에 올라간 사이 칼로 나무에 십자가를 그렸다. 십자가가 무서운 악마는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결국 잭과 거래를 하게 됐다. 두 번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과 그가 죽은 뒤에 지옥에 데려가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세월이 흘러 잭 영감은 핼러윈이 얼마 남지 않은 무렵 세상을 떠났다. 악행을 많이 저질러 천국에 갈 수 없었던 그는 지옥이라도 갈 심산으로 떠돌다가 거래를 했었던 악마와 마주쳤다. 잭은 지옥에라도 들어가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악마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잭은 결국 포기하고 캄캄한 곳에서 길이라도 찾게 해달라고 청하자 악마가 지옥에 있는 불덩어리를 하나 던져주었다. 이때부터 영감이 호박에 담아 들고 다니는 불덩어리가 잭오랜턴이 된 것이다.
비슷한 내용으로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있는 가운데, 잭이 천국은 물론 지옥에서조차 거절을 당했다는 게 바로 잭오랜턴 기원설의 핵심이다. 다양한 전설을 종합해보면 잭은 야경꾼이나 17세기 초반 밤마다 등을 들고 길을 안내하던 길잡이 혹은 도깨비불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잭키 랜턴(Jacky Lantern)’이나 ‘잭 더 랜턴(Jack the Lantern)’이라는 말은 ‘도깨비불(will-o’-the-wisp)’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핼러윈 전문 저자인 레슬리 바나타인과 신디 오트는 미국에 정착한 영국인들도 핼러윈을 축일로 알고 있었다고 밝힌다.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영국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처럼 이미 자리를 잡은 축일조차 기리는 걸 반대했지만 그와 상관없이 핼러윈은 18~19세기에 걸쳐 미국에도 자리를 잡았다. 그렇지만 핼러윈이 미국에서 본격적인 축제의 날로 자리를 잡은 건 19세기에 이뤄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계의 이민 덕분이다. 원래는 이민자만의 축제였지만 이들이 주류 사회에 진출하면서 핼러윈은 만인의 축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윽고 미국이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핼러윈이 유럽에 역수입되었고 곧 아시아에도 널리 퍼졌다.
‘사탕 아니면 골탕(Trick or Treat)’은 기본적으로 아이들을 위한 풍습이다. 의상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사탕 아니면 골탕?”을 외치고 사탕이나 돈을 받는다. 여기에서 골탕(trick)은 위협(threat)의 의미로 대접(treat)을 해주지 않았을 경우 집주인이 치러야 할 대가를 의미한다. 골탕을 먹지 않기 위해 집주인은 미리 사탕 등을 준비해 두는 것이다. 핼러윈을 본격적으로 쇠는 국가에서는 ‘사탕 아니면 골탕’을 위해 별도의 한정판 초콜릿이며 사탕 등을 발매한다. 기존의 제품을 핼러윈의 상징인 잭오랜턴이나 박쥐, 마녀나 악마 등의 모양으로 빚는다거나, 포장의 색깔을 호박색이나 보라색 등으로 바꾼 것들이다. 옥수수 알갱이 모양으로 생긴 사탕인 캔디 콘(Candy Corn)도 대표적 핼러윈의 주전부리이다.
아이들이 ‘사탕 아니면 골탕’ 놀이를 하러 다닐 때 분장과 의상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래 핼러윈의 의상은 흡혈박쥐나 유령, 해골, 마녀나 악마 등 켈트족의 사윈과 관련된 이 세계의 존재들을 본따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제 경계선이 완전히 깨져 분장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고 대상 또한 전 연령대로 퍼졌다. 따라서 게임 등 허구 속의 인물은 물론 연예인과 같은 실존 인물에서 상상의 존재까지 무엇으로도 분장이 가능해졌다. 미국에서는 핼러윈마다 더 기발한 분장 및 의상을 보여주기 위해 경쟁이 벌어진다. 이러한 분장의 역사는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에서 19세기 혹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가이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이들이 가면이나 의상을 입는 풍습에서 비롯된 가이징은 1920~30년대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사탕 아니면 골탕’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함께 발달했다.
<이용재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