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인권·자유 위한 국제기구인데…
유엔 헌장 1조엔 ‘인권과 자유의 존중’이 명시돼 있다. 전 세계 인권의 보루인 유엔 조직이 권력형 성폭력을 비롯한 성범죄의 온상이라는 사실을 영국 BBC방송이 20일(현지시간) 집중 조명했다.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 순간 성적 학대와 착취가 발생한다.” 방송에 나온 증언이다.
내부 고발자들이 그 실상을 지속적으로 공론화하고 있지만, 이들이 오히려 처벌받거나 해고되면서 유엔은 자정 능력마저 상실했다고 BBC는 보도했다.
푸르나 센 전 유엔 여성기구 성폭력 담당 대변인은 BBC방송 다큐멘터리인 ‘내부 고발자 : 인사이드 유엔’에 출연해 “유엔의 많은 여성 직원들이 성희롱과 성추행을 비롯한 성폭력을 겪었다”고 폭로했다. 그는 “유엔은 고위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힘 없는 여성 피해자들을 무시하고 있다”면서 “유엔 안에서 벌어진 성범죄를 외부에 알린 내부 고발자 상당수가 해고됐다”고 했다.
유엔에서 성범죄가 빈발하는 데는 구조적 이유가 있다. 사실상 외교관 신분으로 각국에 파견되는 고위직 직원들이 해당 국가에서 외교적 면책 특권을 누리기 때문이다. 유엔이 면책 특권을 박탈하지 않는 한 체포는 고사하고 수사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범죄 혐의 등을 조사하는 자체 기구인 내부감찰실(OIOS)이 있긴 하지만, 처벌 권한이 없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BBC방송은 벤 스완슨 OIOS 사무국장의 회의 발언을 입수해 이런 현실을 폭로했다.
다큐멘터리엔 스완슨 사무국장의 적나라한 증언이 나온다. “여성 고위 직원이 울면서 찾아 왔다. 남성 사무차장이 그 여성 직원의 바지에 손을 집어 넣었다는 것이었다. 유엔 사무총장과 다른 고위 관리들에게 보고했지만, 즉각 묵살당했다.”
센 전 대변인은 “유엔은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독립 기구를 꾸려 내부 고발자들이 처한 실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유엔이 나설지는 미지수다.
토머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가 지난 6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벌어지는 러시아군의 성범죄를 비판하고 있다. 뉴욕=연합뉴스
BBC방송은 유엔에 지금도 성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엔 에이즈계획(UNAIDS) 수석고문 출신인 마티나 보스트롬은 “자신이 직장(유엔) 내 성범죄 피해자”라고 고백한 뒤 “유엔 본부 안에선 (휴일을 제외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 순간 성적 학대와 성적 착취가 발생한다”고 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뒤늦게 조치에 나섰다. 최근 성명을 통해 “여성 조사관을 고용해 유엔 내부의 성범죄를 조사하고 직원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바로 알릴 수 있는 핫라인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센 전 대변인은 “유엔이 성범죄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유엔이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