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랍스터가 됐을 때 비로소 나는 작가가 됐습니다.”
괴짜 같은 소리지만 영국 출신의 팝아트 작가 필립 콜버트(43)의 이 말은 진실한 고백이다.“갑옷 같은 붉은 옷을 입은 채 물속과 물 밖을 넘나들며 사는 외계인 같은 존재 랍스터”를 자신의 분신으로 택해, 랍스터 캐릭터 하나로 세계적 스타 작가가 된 그의 세 번째 국내 개인전이 성동구 성수동 갤러리아포레 내 더페이지갤러리에서 한창이다.
영국 팝아트… 필립 콜버트 개인전
달리 그림서 예술적 자아와 만나
바스키아·피카소 작품 등 재해석
전시의 시작과 끝은 오로지 랍스터다. 입구에 천연덕스럽게 ‘랍스터마트’라 적힌 간판을 내걸었다. 앤디 워홀이 대량생산의 공산품을 예술 작품으로 끌어들인 상징적 소재인 ‘캠벨수프’ 통을 뚫고 나온 유쾌한 랍스터가 있는가 하면, 구사마 야요이의 ‘땡땡이’ 무늬 같은 바나나 껍질을 뒤집어 쓴 랍스터가 관객을 응시한다. 남성용 소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는 ‘예술’이라 선언했던 마르셀 뒤샹의 변기를 머리에 쓴 랍스터도 만날 수 있다.
파란색 양복을 입은 분홍빛 랍스터는 장난기 지운 심각한 얼굴로 해골 위에 앉아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방한한 작가는 이 작품을 가리키며 “17세기 네덜란드 등지에서 유행한 고전 정물화이자 바니타스(삶의 덧없음) 회화의 주요 소재인 해골, 그리고 책과 깃털 펜 위에 앉아 그 시대와 교감하는 나 자신”이라며 “금속 소재지만 플라스틱처럼 보이게 제작해 21세기의 소비문화와 생산방식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콜버트 작품의 매력은 풍부한 미술사적 지식을 빌려온 재치 있는 진지함에서 찾을 수 있다. 랍스터가 미술의 주요 소재로 등장한 게 바로 17세기 서양 정물화부터였으니, 해골 위 랍스터를 “바로 나”라고 한 것은 뼈 있는 한마디다. 그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바닷가재 전화기’를 본 후 2009년부터 랍스터를 소재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전화의 수화기 자리에 바닷가재가 올려져 있는 작품이었는데, 으레 있어야 할 자리에 뜻밖의 물건이 놓여 있는 충격이 또 다른 ‘예술적 감흥’이 된다는 지점을 포착했다.
고전 명화를 차용해 랍스터를 주인공으로 바꿔놓는 ‘헌트(Hunt)’ 시리즈가 그의 대표작이다. 예를 들어 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프랑스의 급진적 혁명가 장 폴 마라가 목욕탕에서 암살당한 장면을 그린 ‘마라의 죽음’은 반신욕 하는 랍스터로 재해석됐다. 숨진 마라의 손에는 편지가 쥐어 있었지만 분홍 랍스터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작품 제목은 ‘마라의 죽음 그리고 랍스터의 탄생’
작품 안에서 예술사의 거장을 찾아내는 것이 콜버트의 그림을 즐기는 방법이다. 장미셸 바스키아의 상징 같은 ‘왕관’을 쓴 랍스터가 동물들과 싸우는 작품에서는 바스키아, 파블로 피카소, 루치안 프로이트의 인물화 패러디를 만날 수 있다. 이 같은 전투 장면에 대해 작가는 “거장들과 함께 싸워가며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정수”라고 설명했다.
그는 예술적 자아인 랍스터가 사는 세계를 ‘랍스터랜드’라 명명하고 온·오프라인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만의 메타버스 세상을 구현했다. 지난해에는 ‘랍스타(Lobstar)’라는 이름의 7777개 한정판 대체불가토큰(NFT)을 발매했다. 유머러스하고 실험적인 작가지만 결코 경박하지 않다. 철학 전공자로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그림 곳곳에 숨겨두기도 하는 그는 “명작을 인용하는 것은 예술적 자아를 확인하는 과정이자 리사이클(재활용)의 의미도 있다”면서 “가재는 갑옷을 입고 있지만, 예술의 옷을 한 겹 더 입음으로써 뜻밖의 영감을 얻고 정체성의 힘을 얻기도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7월 10일까지다.
<글·사진=조상인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