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인터뷰- 고 이재성군 모친 이정희 씨
“처음에는 울기만 했습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지 한숨 짓다가, 밖으로 뛰쳐 나와서 그리피스 팍으로 운동도 하러 다니고 그 사이에 딸 제니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면서 낳은 외손자가 힘든 세월을 많이 위로해 주었습니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다는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1992년 LA 폭동 당시 불타는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 뛰쳐나갔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외아들 이재성 군(당시 19세)을 회고하는 모친 이정희씨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또렷한 기억의 생생함과 30년 간 켜켜이 쌓인 슬픔과 회한, 그리고 한인사회의 미래를 위한 조언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었다.
■행주산성 역사를 실천에 옮긴 정의파 청년
폭동이 발생하고 이틀 째인 1992년 4월30일에 폭도들이 한인타운에서 날뛰는데 TV만 보고 왜 도와줄 생각을 안하느냐고 당시 샌타모니카 칼리지에 갓 입학해 공학도로서의 꿈을 가지고 있던 아들이 따지듯이 물어봤다고 이씨는 회상했다. 라디오 방송에서 한국 사람들이 나와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서 행주산성을 예로 들었다고 한다.
이씨는 행주산성의 유래를 묻는 아들에게 “임진왜란 행주대첩때 무기가 없어서 아녀자들이 왜군들에게 무기로 던질 돌덩이를 치마로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고 설명해주니 아들이 “엄마도 나가서 도와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그때가 오후 5시경이었다.
중국집에서 음식을 투고를 해와서 먹으라고 했는데, 손도 안대고 청바지에 흰 반소매를 입은 채 폭도들에 의해 불타는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 그냥 뛰쳐나갔다. 아들이 밥도 안먹고 나간 것이 얼마나 속상한지 한동안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못 먹을 정도였다. 계속 비퍼를 쳐도 밤새도록 연락이 닿지 않아서 라디오 방송에도 수소문을 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5월1일 아침, 한 식당에서 친지들과 식사를 하다가 한인청년 한 명이 한인타운 3가와 호바트의 원산면옥 식당앞에서 총격에 희생됐다는 TV 뉴스를 접한 이씨는 “머리 뒤통수 나온 것이 우리 아들 같았지만 그 전날 흰색 셔츠를 입고 나갔기 때문에 다행히 재성이는 아니다”라고 애써 부정했다고 한다.
집에 돌아오는데 “여동생 제니가 집앞에서 푸들 강아지를 안고 울면서 오빠가 뭔가 잘못된 것 같다”며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이씨는 “당시 한국일보를 방문해 신문에 나온 사진을 보고 아들과 비슷한 모습을 봤지만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왜냐하면 아들은 그날 하얀 셔츠를 입고 나갔는데 그게 피에 젖어 검정색이 된 사실을 애써 부인했다.
결국 그날밤 USC 시신 검시소에 갔을 때 유품으로 다임 동전과 찌그러진 안경, 용궁 식당의 개업기념일 볼펜을 보고도 아들의 사망을 애써 부인했으며 검시소측은 사체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씨가 양복을 입고 안경을 쓴 아들의 시신을 본 것은 1992년 5월6일 아드모어 공원에서 5,000여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재성군의 장례식 때였다.
■‘애어른’ 같았던 아들
고 이재성 군의 부친 이영희씨가 독자였다. 자동적으로 재성군은 3대 독자였다. 한 번은 지인이 아들을 잃은 이영희씨를 찾아와 위로해준답시고 무릎을 치면서 “이 형은 이 다음에 죽어서 조상님을 보면 뭐라고 이야기할 것이냐? 대를 끊어 놨으니 어떻게 할려고 하느냐?”라고 하는 소리에 너무 기가 막히고 속상했다고 한다.
이씨는 재성군이 어렸을 때 엄마로서 안할 말을 많이 하고 살았다고 후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너는 3대 독자로 우리 집안의 기둥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내는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한다. 아빠가 잘못되면 네가 아빠를 대신해서 우리를 돌봐야한다”고 수시로 말했다는 이씨는 “커서 이야기해도 될 텐데, 초등학생시절부터 어린애에게 부담을 너무 많이 주어 후회가 된다”고 회한에 젖은 미소를 지었다.
서른 여섯에 늦게 낮은 외아들이라 그만큼 기대가 컸다고 한다. 이씨의 어머니가 오빠집에 가 있으면 재성군이 할머니 괜찮으시냐고 안부전화를 드릴 정도로 예의범절이 발라 일가 친척들에게도 ‘애어른’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씨는 현재 재성군이 살아있으면 49세의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애 하나, 둘은 낳았을 나이라며 외향적인 성격이어서 군인이나 경찰, 혹은 비즈니스맨이 되었을 것이라며 못내 한숨을 지었다.
■먼저 간 아들의 뜻 기억해야
이씨 부부는 아들의 이름을 후세에도 계속 남기기 위해 이재성 추모장학재단을 우여곡절 끝에 만들었다.
한국 정부가 폭동 당시 한인타운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아들을 추모하기 위해 1993년 이재성 추모장학재단 설립을 위해 한화로 10억원을 지원한 적이 있다. 이씨는 “추모장학재단은 총영사와 장학재단 이사장의 공동서명이 있어야 인출이 되는데, 재단 운영과정에서 잡음이 많아 할 수 없이 운영을 한인장학재단에 넘겼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씨는 아들의 희생을 추모하기위한 장학재단을 독자적으로 설립하기위해 남편과 자신, 딸이 함께 10만달러를 모았다. 이씨는 “자신이 다니는 나성영락교회에 이재성 장학재단으로 이름을 만들어 20년전 10만달러를 기증함으로써 아들의 이름으로 교회측이 계속 운영하도록 한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재성 장학재단의 이름으로 장학금이 지급되기 때문에 수혜자들인 한인고교생들과 대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이재성 군에 대해 물어보고 폭동에 대한 역사교육이 저절로 되는 효과를 본다고 한다.
■‘뭉쳐야 산다’는 교훈
“폭동을 통해서 배운 것은 역시 뭉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10만명의 한인들이 모여 올림픽과 버몬트, 웨스턴 길에서 평화대행진을 한 것이 너무 고맙고 감사했다”고 밝힌 이씨는 LA폭동의 가장 큰 피해자인 LA 한인사회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기보다는 모든 인종이 함께 어울려사는 LA를 만들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다며 당시에 안젤라 오 변호사처럼 한인사회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인사가 별로 없어 피해만 입었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고 억울해했다.
“한인사회가 그 당시 흑인사회와의 관계를 소홀히해 원만한 관계정립에 실패한 것은 사실”이라며 이제는 한인 1.5세나 2세들이 흑인 및 히스패니계 커뮤니티 와의 관계정립을 제대로 하는 데 힘쓸 것을 요청했다. 폭동으로 자신은 외아들을 잃었지만 상당수의 한인들이 평생 피땀흘려 쌓은 재산이 하루 아침에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고 한인사회 전체가 미 주류언론의 편향된 한흑갈등 보도로 폭동의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이 이씨의 생각이다.
이씨는 “이민사회 각 가정에서 폭동이 왜 일어났으며 어떤 피해를 입었는 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소상하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심지어는 새로 이민 오는 한인들은 4.29 폭동을 이야기하면 4.19 혁명으로 잘못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어서 1세들에 대한 교육도 필요함을 느꼈다”고 강조했다.
<박흥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