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미국에선 흑인이거나 라틴계라면, 그리고 거주지가 공화당 영향권 아래 있다면, 투표권을 갖고도 투표소 문턱을 넘기가 어려워지게 됐다.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보수 성향 주들이 앞다퉈 투표권을 제한하는 법 제정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인권의 토대나 다름없는 ‘시민권’이 무참히 망가진 아이러니한 현실에 개탄이 쏟아진다. 당장 내년 중간선거부터 정치적 파장을 낳을 수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다.
투표권 문제를 놓고 보혁이 맞붙은 최전선은 바로 텍사스주다. 주정부와 주의회를 모두 장악한 공화당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사기’ 주장에 동조해 투표권 제한법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주상원을 통과한 법안은 지난달 30일 주하원에서 민주당 의원들의 집단 퇴장으로 표결이 무산돼 일단 제동이 걸린 상태다.
하지만 민주당이 머릿수부터 열세라 법제화는 사실상 시간 문제다. 그레그 애벗 주지사는 “책임을 포기한 이들에게 임금을 줄 수 없다”고 겁박하면서 조만간 특별의회를 소집하겠다고 천명했다. 브리스코 케인 주하원 의원(공화)은 “더 나은 법안을 만들 시간이 생겼으니 오히려 잘 됐다”며 한 술 더 떴다.
텍사스의 새 투표법안은 ▲드라이브 스루 투표 폐지 ▲24시간 투표 금지 ▲우편투표 규제 등 시대역행적 조항으로 가득하다. 특히 평일 투표는 오전 6시에 시작하면서 일요일 투표만 오후 1시 이후로 제한한 조항은 주말마다 교회에 모이는 흑인 유권자들의 투표 조직화를 막기 위한 것이란 비판이 거세다. CNN은 “해당 법안이 미국민 전부를 위한 게 아니라 흑인과 라틴계 등 민주당 지지자들의 투표를 어렵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는 걸 공화당 스스로 입증한 꼴”이라고 꼬집었다.
이뿐이 아니다. 텍사스의 급격한 보수화는 거침이 없다. 임신 6주가 지나면 성폭력 피해자든 누구든 예외 없이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도 이번 회기에 통과시켰다. 또 앞으론 소총뿐 아니라 권총도 별도 면허 없이 소지할 수 있게 됐다. 인종차별을 비판적으로 다룬 인종이론 교육 또한 금지될 가능성이 높다. 성, 총기, 인종 등 이념지향적 의제에서 모조리 퇴행한 셈이다. 텍사스가 트럼프 시대를 거치며 양극단으로 갈라진 미국 사회의 분열상을 보여 주는 축소판이 됐다는 평가마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