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유엔‘두 국가안’결의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여러 차례 협정 맺었으나 동예루살렘 등 핵심 해결 안 돼
“이스라엘 수도는 예루살렘”편파 발언하는 트럼프 성향상
새로운 이^팔 평화계획도 편향된‘두 국가안’일 듯
지난 2017년 12월 백악관 성명을통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공식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 건국 70주년인 2018년 5월 14일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했다.
이어 같은 달 23일 이스라엘을 찾은 그는 유대인 전통 모자인 ‘키파’를 쓴 채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유대인 성지 ‘통곡의 벽’을 방문, 다시 한번 ‘친(親)이스라엘 메시지’를 세계에 보냈다.
트럼프의 언행은 ‘분쟁의 항상성’을 보여 온 이-팔 분쟁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오래전부터 팔레스타인을 대표해 온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1993년 오슬로협정 이후 수립된 팔레스타인자치정부(PA)는 예루살렘을 새로 건설할 독립 국가의 수도라고 주장해 왔고, 팔레스타인 기본법 제3조에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의수도’라고 규정해 두었다. 동예루살렘의 옛 시가지에 위치한 ‘통곡의 벽’ 바로 위에는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가 승천했다는 황금 돔과 알 아크사모스크가 있다. 유대 성지인 동시에 이슬람 제3의 성지인 것이다.
지난 6월 말 미 백악관은 ‘이-팔평화계획’ 내 ‘경제 분야’로 향후 10년간 팔레스타인의 경제 발전을 위해 50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미 고위 당국자들은 7월 말부터 이달 초까지 평화계획 최종안 작성을 마무리하기 위해 이스라엘^이집트^ 요르단 등을 방문했다. 이들의 방문은 ‘정치 분야’의 해결책을 찾기 위한 것으로, 평화계획은 오는 9월 17일로 예정된 이스라엘 크네세트(의회) 선거 전후에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팔 분쟁의 역사성과 분쟁 강도, 그간 마련된 여러 평화안의 실패에 비춰 볼 때 트럼프의 평화안이 성공할 가능성에는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트럼프 정부의 이란 핵 협정(JCPOA) 탈퇴 및 미-이란 간 호르무즈 해협 위기, 최근 약화되긴 했지만 알카에다 ^ 이슬람국가(IS) 등 살라피스트 지하디즘 그룹에 대한 통제 문제, 시리아 내전, 예멘 내전, 친미 중동 국가들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간 단교 사태,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을 둘러싼 사우디와 터키 간의 작은 분열 등 중동 국제 관계 차원에서 볼 때, 어떤 이-팔 평화안도 성공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유대인 정체성 및 시온(지금의 동예루살렘)에서의 ‘향토’ 의식은 구약성서기에 형성됐다. 로마 식민시기인 서기 135년 이후 유대인 유랑기가 시작되었고, 1880년대부터 그들은 다시 ‘고향’ 시온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후 1^2차 세계대전 시기 유대인들의 대량 이주가 시작되면서 이미 오래전 ‘아랍화’되고 이슬람을 받아들였던 이 지역의 주인, 팔레스타인 아랍인과의 갈등이 시작됐다.
1947년 유엔 총회는 ‘두 국가안(案)’을 결의했다.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이래 1,800여년 만인 1948년 5월 14일 주로 유럽 동^서부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국가 창설을 선언했다. 1948년, 1956년, 1967년, 1973년에 이스라엘-아랍 전쟁이 각각 발생했고, 1970년대 후반부터 평화협상 국면으로 진입했다.
1964년 창설된 PLO가 있긴 했지만, 당시 PLO는 국제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대표 기구’로 인정받지 못했다. 다시 말해 국제사회에선 팔레스타인인들을 대표할 수 있는 대표기구가 없었다.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은 미국의 중재하에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맺은 협상이었다.
이 협상에서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에서 차지한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는 대신, 남서쪽 안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어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평화협정으로이스라엘은 동쪽 안보를 확보했다.
이스라엘과 온건화된 PLO 간 직접 협상은 1991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처음 시작됐고, 그 결실이 ‘땅과 평화의 교환(peace for land)’이라고 하는 오슬로협정(1993년 9월 13일)이다. PLO가 팔레스타인인의 대표로서 협상의 당사자가 된 최초의 협정이었다. 한편 이슬람주의 기반 조직인 하마스는 무장독립투쟁 단체로 자리매김해 있었다.
오슬로협정의 주요 내용은 △가자지구와 서안의 단계적 이양 및 자치 인정 △팔레스타인 자치의회 선출 △점령지 이스라엘군 철수 △가자지구와 예리코시(市)에 팔레스타인 자치 행정부 수립 등이었다. 이 협정은 한 번으로 끝나지않았다. 여러 단계를 거쳐 새로운 협정이 맺어진 것이다. 2단계 자치협정(1995년 9월), 헤브론협정(1997년 1월), 와이밀스 평화협정(1998년 11월), 와이밀스 Ⅱ 협정(1999년 9월), 그리고 2000년 캠프데이비드 중동평화협정Ⅱ(결렬)까지 지난한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됐다.
그러나 이후 핵심 의제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서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는 결국 원점으로 회귀했다.
2000년 캠프데이비드 협상에서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는 동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인 알 아크사 모스크에 대한 PA의 관할권을 인정하되, 옛 시가지에 대한 이스라엘 주권은 유지하겠다는 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야세르아라파트 PA 수반은 이를 거부하고 1967년 점령한 동예루살렘 지역 전체에 대한 주권을 요구했다. 그만큼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탄생지인 동예루살렘 및 옛 시가지에 대한 소유권을 서로 양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사우디 평화안(2002년), U.S. 로드맵(2002~2003년), 아나폴리스 선언(2007년) 등 지속적인 중재안과 이에대한 이스라엘^PA의 대응이 있었으나, 이 모든 중재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미국의 로드맵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한 연설(2002년 6월 24일)에 있었던 “평화롭게 이스라엘과 나란히 살고 있는 독립 팔레스타인의 국가”라는 언급으로 그 원칙과 윤곽이 드러났다. 즉 1947년 유엔결의의 ‘두 국가안’을 다시 한번 제시한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신(新) 중동정책’(2011년 5월 19일)은 이-팔 국경을 ‘상호 협상을 통합 합의’로 결정한다면서 ‘두 국가’ 원칙을 재천명했으나, 역시 이스라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승인한 트럼프 정부의 이-팔 평화계획도 앞선 미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측에 기울어진 ‘두 국가안’일 것이다.
이-팔 평화협상의 주요 의제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과 국경 획정 문제, 동예루살렘 지위 문제,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문제, 가자와 서안에 건설된 유대인 정착촌 철수 문제, 중동 지역 전체의 평화 정착 문제 등이다. 이 의제 중 어느 하나도 합의로 해결되기 힘들다.
2012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를 통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비회원 옵서버 단체’ 지위에서 ‘비회원 옵서버 국가’로 격상되긴 했으나, 유엔에서 온전한 주권국가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의거부권 행사로 ‘회원국’ 지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갈수록 주변 아랍국한테서까지 소외받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눈물은 앞으로도 오랜 기간 마를 날이 없을 것 같다.
정상률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교수
2020년 한국중동학회 회장
지난 2017년 5월 이스라엘을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지‘통곡의 벽’을 방문해 유대인 전통 모자인 키파를 쓰고 오른손을 벽에 댄 채 눈을 감고 있다. 현직 미국 대통령이 공식 일정으로 통곡의 벽을 찾은 것은 처음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친이스라엘 기조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아래 왼쪽부터) 지난 1993년 9월 13일 이츠하크 라빈(왼쪽)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빌클린턴(가운데) 미국 대통령의 중재 아래 미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오슬로평화협정 서명식에 나란히 참석해 악수하고 있다. 당시의 한국일보 신문 지면에 실린 사진이다. 도널드 트럼프(아래)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25일 미 워싱턴 백악관에서 시리아 골란고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하는 포고문에 서명한 뒤, 베냐민 네타냐후(오른쪽) 총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트럼프 미 행정부는 앞서 2017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고, 이듬해 미국 대사관도 그곳으로 옮기는 등 줄곧 친이스라엘 행보를 보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