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힘든 일도 함께 하는 게 가족 아닌가요?"
로렌스빌에 살고 있는 박미옥(사진) 씨의 하루일과는 친정 어머니의 기저귀를 확인하고 갈아 주는 일부터 시작된다. 한쪽 팔만 움직일 수 있는 어머니의 식사를 도와주고 양치질 할 때는 다른 한쪽 팔을 받쳐 주는 일도 박 씨의 주요한 일과다. 외출은 어머니가 주무시는 시간을 주로 이용한다. 그리고 집을 나서기 전 어머니를 안전하게 침대에 모셔두고 두번 세번 안전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똑같은 하루일과 속에 석달 마다 어머니를 모시고 정기검진을 받고 반년 마다 어머니의 심장 검사를 포함해 암치료를 위해 병원에 함께 가는 것도 박 씨에게는 잊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81세의 노모를 돌보는 일은 아무리 딸이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리라. 더구나 내년이면 환갑을 맞는 박 씨에게는 육체적으로도 힘이 들 때도 많다. 하지만 박 씨의 표정은 밝다. 수년 동안 병 간호를 하면 지치고 힘든 기색도 내보일만 하지만 박 씨는 늘 명랑하다. 그래서일까 나이보다 젊어 보이기까지 하다.
가정의 달을 맞아 한 지인에게 주변에 소개할 만한 사람 없냐고 물으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박 씨를 소개한다. 하지만 인터뷰에 응할 지는 모르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장시간의 통화 끝에 겨우 인터뷰 약속을 받아 내고 어렵게 박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 기저귀 갈기로 하루일과 시작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네요. 그냥 어머니를 모시고 있을 뿐인데 이런 인터뷰가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하지만 소개해 준 분이 평소 신뢰하던 분이고 인터뷰하는 신문도 한국일보라고 해서 큰 맘 먹고 나왔어요. 아마 다른 신문이었으면 안 나왔을 거에요"
특히 최근의 한국 내 정세와 관련 '틀린' 보도를 일삼는 언론을 혐오한다는 박 씨의 한국일보는 객관적이라는 평가에 기자는 어깨에 힘을 주며 대화를 이어 갔다.
박 씨가 지금같은 일과를 보내게 된 것은 정확히 6년 전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따지면 8년 전부터다. 90년대 텍사스 달라스로 이민 온 박 씨 가족은 2002년 애틀랜타로 이주했다. 그러나 얼마 후 한국에 계셨던 아버님이 돌아 가셨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는 영주권까지 아예 반납하고 한국에 있던 박 씨 어머니는 2007년 다시 영주권을 받아 한국과 미국을 오갔다. 그리고 2009년에는 2년짜리 비자를 받아 한국에 머물렀다.
"비자가 만료되기 전인 2011년에 미국에 오기 전 친구분들하고 일본 온천 여행을 계획 중었어요. 그 때 한국은 몇년 만의 강추위가 닥친 해였죠 그런데 갑자기 한국 친구분으로부터 어머니가 쓰려졌다는 소식이 들려 왔어요. 너무나 놀라 무작정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 좌석이 비기만을 기디렸어요. 비행기 안에서는 눈물만 나오더라구요"
8년 전 뇌경색 쓰러진 어머니 암판정까지
뇌경색으로 쓰러진 박 씨 어머니는 17일 만에 중환자실에서 나왔다. 하지만 의식은 여전이 없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덩치가 있던 박 씨 어머니를 돌보던 간병인은 힘들었는지 이틀만에 그만 뒀다. 결국 그때부터 박 씨가 '간병'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박 씨 어머니는 두달이 지나도 의식은 돌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양방과 한방을 동시에 진료하는 유명종합병원으로 옮기려 했지만 대기자가 많아 입원이 불가능했다. 그러던 중 평소 아는 목사님을 통해 한방 치료를 하면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또 다른 목사님을 소개 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중국에 까지 가서 한방 치료를 받았다.
"치료 2개월 만에 진짜 의식이 회복 됐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지팡이를 의지해 일어 설 수 있을 정도가 됐어요. 저를 비롯해 식구들에게는 모세의 기적이 따로 없었어요. 하지만 중국에서 더 치료를 받으라는 우리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어머니는 한국으로 되돌아 오셨어요. 아마 중국에서 외로우셨던 같아요"
그 뒤 공기 좋은 우이동에서 재활치료를 받았지만 박 씨 어머니의 병세는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결국 의사의 서명을 어렵게 받아 내고 비행기 좌석을 2개 예약하는 묘수 끝에 어머니를 비행기에 태워 미국으로 모실 수 있었다. 그때가 6년 전인 2013년 4월이었다.
"흔히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고 하잖아요. 1년 넘게 힘들게 병원 치료를 다니면서 어머니를 간병하던 중에 2014년 말께 유방암 진단을 받았어요. 3기라고 하더라구요. 정말 절망적이었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도 하나님만 찾았어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암이 다른 부위로 전이 되지는 않았고 결국 가슴절제 수술을 받은 끝에 회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작년 12월에 화장실에서 쓰러지는 사고을 겪었고 폐렴 증세까지 도졌다. 이후 박 씨 어머니는 겁을 먹고 거동을 스스로 멈췄다.
"지금은 여젼히 말은 하지 못하시만 알아 듣는 것은 다 알아 들으세요. 예전처럼 지팡이를 의지해서라도 움직이셨으면 좋겠는데... "
힘들 때마다 신앙과 남편이 큰 힘 돼
박 씨는 몇 년 동안의 어머니 병간호를 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짜증 날 때도 많았다고 고백한다. 그 때마다 신앙과 남편이 힘이 됐다.
"힘들 때면 가끔 올케에게 어머니 병간을 맡기고 남편하고 골프도 치죠. 남편은 어머니를 한국에서 모시고 오던 날 어머니 침대 높이도 신경 써서 조정해 줄 정도로 세심하게 어머니를 배려해 줬어요. 요즘도 밤에 1층에 계신 어머니 병간으로 위해 제가 2층에서 수시로 오르 내리자 저와 함께 아예 1층 거실에서 자는 것을 마다하지 않아요. 손님들이 오면 거실 침구 정리하기 바쁘죠. 사람들이 큰 딸과 큰 사위가 어머니를 살려다며 남편을 많이 칭찬해요"
그래서 박 씨는 남편이 너무 고맙다. 시어머니가 편찮았다면 남편이 어머니에게 했던 것처럼 박 씨도 할 수 있었을까 늘 자문해 본다.
"제가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어미니 치료비 때문에 남편이 은퇴를 미루고 일을 계속하고 있어요. 가끔 은퇴한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워 하기도 하지만 기꺼이 어머니를 위해 일하는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요"
하루 하루 어머니의 병간호로 힘들지만 씩씩하고 웃음을 늘 머금는 박 씨에게는 소망과 아쉬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아까도 말했지만 어머니가 지팡이를 의지해서라도 일어 섰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이런 생각도 어머니 연세를 생각하면 욕심인 것 같아요. 그저 오래 사시고 다시는 병원에 입원하는 일만 없었으면 해요. 그리고 주변에 보면 충분히 모실 수 있는 상황인데 부모님을 노인 아파트나 다른 노인 시설에서 지내시게 하는 거를 많이 봐요. 물론 다 사정이 있겠지만 저는 너무 안타까워요. 가족이라는 게 뭔가요. 함께 있으면서 힘든 일도 함께 하고 그런 게 가족 아닌가요? 가정의 달이잖아요. 가정과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 깨달았으면 해요" 이주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