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레이셔 국립공원을 미국의 알프스라고 한다. 빙하가 녹아 생긴 산봉우리, 골짜기, 호수로 이루어진 이 공원을 4박 5일의 일정으로 다녀왔다. 우리 일행, 아내와 두 딸과 여덟 살 귀염둥이 손자는 시애틀 막내딸 집을 떠났다. 모처럼 운전대를 잡지 않아 나는 편안히 앉아서 I-90 양쪽으로 펼쳐지는 광활한 평야와 산천을 감상했다.
글레이셔 공원은 시애틀서 아홉 시간 거리라고 하지만 중간에 휴게소에 들르고, 컬럼비아 강 옆 언덕 위에 세워진 열다섯 마리의 철제 조각 말, 와일드 호스 기념탑을 구경하느라 몬테나 주까지 가면 날이 어두워지게 생겼다. 일박할 장소를 찾은 곳이 아이다호주 샌드 포인트에서 산골짜기로 한참 들어가 있는 셀커크 스키 산장이었다. 스키 시즌이 아니므로 한가했다. 몇 달 후면 사람들로 붐빌 주위의 언덕은 거의 45도의 경사여서 스키를 타다가 곤두박질하지 않을까 겁이 났다. 다음 날 아침, 딸들이 양파, 버섯, 브로콜리를 넣고 끓여주는 라면을 맛있게 먹고 그곳을 떠났다.
트로이를 지나서 쿠테나이 폭포가 나왔다. 물결이 거칠고 우렁차게 흐르는 푸른 강물은 너무 싱그럽게 보였으며 고무배를 타고 흘러내려가고 싶었다. 이 곳은 쿠테나이 인디안의 성지라고 한다. 시간이 없어 흔들리는 다리를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꼬불꼬불한 길을 숨죽이며 운전하여 밤 아홉 시가 지나서 매니 글레이셔 산장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침 작은 유람선을 타고 스위프트커런트와 죠세핀 호수를 건너가서 왕복 3마일의 등산로를 하이킹했다. 가뭄으로 등산로는 먼지가 뿌옇게 일고 주위의 활엽수와 침엽수는 모두 시들시들 기운이 없어 보였다. 배를 타고 오면서 건너편 계단식 암벽의 바위 사이에 어미와 새끼의 검은 곰 두 마리가 있는 것을 보았다. 하이킹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매니 글레이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스위스 스타일 호텔 로비에 앉아 물고기의 비듬처럼 잔잔한 파도가 이는 스위프트커런트 호수 위로 우뚝 솟은 그레널 포인트 삼각 봉우리는 잊을 수 없는 절경(絶景)이었다.
다음 날 고잉투더선 로드를 따라서 그 유명한 로갠 패스 분수령에 갔다. 찬 바람이 불고 구름으로 덮인 주차장에서 차문을 여니 온몸이 얼어붙는 영도였다. 기온을 미리 알아보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나는 여행 보따리를 풀고 속옷과 잠옷을 모두 꺼내 중공군 병사처럼 겹겹이 입고 히든 호수를 향해 등산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알파인 식물과 화초가 만발한 계단식 통로를 한 시간 걸어서 관망대에 도착했다. 아래로 보이는 빙산 봉우리로 둘러싸인 히든 레익 호수는 말 그대로 감추어진 비경(秘景)이었다.
일 년에 약 200만 명의 글레이셔 공원 방문객의 90퍼센트가 이 고잉투더선 로드를 통과한다는데, 서쪽 글레이셔의 산불로 도로가 차단되어 로갠 패스에서 들어왔던 길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날이 저물어 스마트 폰으로 동쪽 글레이셔 공원 호텔을 찾아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 호텔은 소나무 껍질이 울퉁불퉁한 통나무로 집을 지은 것이 특이했다. 매니 글레이셔 호텔과 이 호텔은 일 년 전에 예약도 어렵다고 한다. 서쪽 글레이셔의 산불로 예약 취소가 있어 우리는 방을 구할 수 있었다.
글레이셔 국립공원은 등산애호가의 천국이라고 한다. 등산로가 부지기수로 많아 평생을 두고두고 등산해도 모두 할 수 없다고 한다. 인생은 짧고 가볼 곳은 많다. 아내와 나는 늙어서 글레이셔 국립공원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뜻 깊은 나들이였다.
윤재현 (한국일보 독자·부에나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