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의 투쟁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태도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1754년에 지방 의회들은 자기들의 자치권의 조그마한 부분까지도 다른 기관에게, 심지어 자기들 자신이 선출한 기관에게 양도하는 것까지 거부함으로써 올바니연방안(Albany Plan of Union)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독립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상부상조하는 것이 효과적임을 알게 되자 개별적인 권한을 포기하는 데서 생기는 두려움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존 딕킨슨이 1776년에 ‘연합규약과 영속적인 연합(Article of Confederation and Perpetual Union)안을 제시했다. 대륙회의는 1777년 11월 이를 채택했고, 모든 州가 이를 추진함으로써 1781년부터 실시되었다. 이 규약에 의해 수립된 정부의 뼈대에는 약점이 많았다. 중앙정부에는 필요할 때 관세를 설정하고, 상행위를 규제하며,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이 없었다. 중앙정부에는 오직 중앙정부 만이 가질 수 있는, 국제관계를 통제하는 권한이 없었는데, 여러 주들이 외국과 독자적인 교섭을 하기 시작했다. 9개 주가 독자적으로 육군을 조직했으며, 몇몇 주들은 독자적으로 해군을 갖기도 했다. 괴상한 재화들이 잡다하게 많았으며, 주정부와 중앙정부가 발행한 온갖 지폐들은 그 가치가 급속도로 하락하였다.
독립전쟁 후의 경제적 어려움은 변화에 대한 요구를 촉진시켰다. 독립전쟁의 종식은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쌍방의 군대에 보급 물자를 공급했던, 그리고 영국의 상업 체제에 참여함으로써 얻는 유리한 조건을 잃게 된 상인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주들은 그들의 관세정책에서 미국의 물품에 특혜를 부여했는데, 그러나 이들 관세는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정부가 균일한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요구를 낳게 했다. 농민들이 독립전쟁에 이어 일어나 경제적 어려움의 고통을 어쩌면 가장 많이 겪었다. 농산물의 공급은 수요를 초과했고, 주로 채무가 많은 농민들 사이에 불안이 감돌았다.
그들은 저당 잡힌 자기들의 재산이 유실되는 일이 없도록 다짐해주는, 또 채무로 해서 투옥되는 일이 없도록 해주는 강력한 구제책을 바라고 있었다. 법원들에는 채무소송 사건이 가득 밀려 있었다. 1786년 여름 내내 몇몇 주에서 열린 주민대회와 비공식 회합에서는 주행정의 개혁을 요구했다. 1786년 가을 전 육군대위 다니엘 셰이즈의 지휘아래, 메사추세츠주의 농민 폭도들은 다음 주선거 때까지 군법원이 채무관계의 재판을 더 이상 하지 못하도록 힘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 1787년 1월 1,200명 농부들의 오합지졸 군대가 스프링필드에 있는 연방 병기차를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주로 장대와 갈퀴로 무장한 폭도들은 소수의 민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때 벤자민 링컨장군이 보스턴으로부터 군을 이끌고 도착하여 남아있는 셰이즈 일당의 폭도들을 패주시켰고, 폭도들의 지도자는 버몬트로 도망했다. 정부는 폭도 14명을 체포하고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마침내 일부는 사면되고 다른 폭도들은 단기형을 복역한 후 석방되었다. 이 폭동이 실패한 후, 대다수가 폭도들에 동정적이었던 새로 선출된 주의회 의원들은 채무를 구제해 달라는 이들의 요구의 일부를 충족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