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7년에는 온갖 불화의 요소를 다시 자극하는 또다른 일련의 조치들이 취해졌다. 영국의 재무장관 찰스 타운센드는 새로운 재정계획을 작성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메리카와의 교역에 부과되는 관세를 보다 효율적으로 징수함으로써 영국인의 세 부담을 줄이려 들었던 그는 세관관리를 강화하고, 동시에 식민지 사람들이 영국에서 수입하는 종이, 유리, 납 및 차에 대한 관세를 부과할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 소위 '타운센트 법령'이라는 이 법령들은 (인지조례와 같은)내국세는 형평에 어긋나지만 식민지 사람들이 수입해가는 상품에 부과되는 세금은 합법적이라는 전제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타운센트 법령은 부분적으로는 식민지의 지사, 법관, 세관 관리 및 아메리카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을 위해 사용할 수입을 얻기 위해 안출된 것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필라델피아의 변호사 존 디킨슨은 <한 펜실베이니아 농부의 편지>라는 글에서, 영국 의회는 대영제국을 통상할 통제할 권리는 가졌겠지만 식민지에 대해서 대외적인 관세건, 대내적인 관세건 과세를 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타운센드 법령의 제정에 따른 동요는 인지조례가 일으킨 것보다는 덜 격렬했으나 특히 동부 해안지대의 도시들에서는 격렬했다. 상인들은 다시 한번 불수입운동을 전개했고, 주민들은 현지산품으로 임시변통해서 살아갔다. 예컨대 식민지 사람들은 집에서 짠 옷감으로 옷을 해입었고, 차의 대용품을 찾아냈다. 그들은 가내공업으로 만든 종이를 사용했고, 집에는 페인트칠을 하지 않았다. 보스턴에서는 새 법령의 시행이 폭력사태를 자아냈다. 세관 관리들이 관세를 징수하려들자 사람들이 달려들어 거칠게 대항했다. 이 법령 위반 사건에 대응하여 세관 관리를 보호하기 위해 영국군 2개 연대가 파견되었다. 보스턴에 주둔한 영국군의 존재는 소요를 자초하게 마련이었다. 1770년 3월5일 보스턴 시민과 영국군 병사간의 반목은 또다시 폭력사태로 번졌다. 영국군인들의 악의없는 눈싸움이 군중들의 공격으로 발전했다. 누군가가 발포명령을 내렸다. 싸움이 멎었을 때 3명의 보스턴 시민이 눈 위에 쓰러져 죽어있었다. "보스턴 학살"이라고 불리게 된 이 사건은 영국의 냉혹성과 폭정의 근거라고 극적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반항에 직면한 영국 의회는 1770년에 전략적 후퇴 노선을 택하여, 차에 대한 과세를 제외한 모든 타운센드 관세를 폐기하였다. 차는 식민지에서 극소수 사람들만이 마시는 사치품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볼 때 영국 의회의 조치는 식민지 사람들이 큰 양보를 얻어낸 것을 뜻했다. 그래서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은 대체로 가라앉게 되었다. "영국의 차"에 대한 식민지 사람들의 수입금지는 계속되었으나 별로 철저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 식민지의 번영은 날로 더해가서 식민지의 지도자들은 미래의 일은 저절로 해결되도록 내버려둘 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