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영국은 18세기에 유럽과 카리브 해역에서 간격을 두고 연속적으로 전쟁을 했었다. 이 전쟁들에서 영국은 주로 카리브해의 설탕수수를 많이 재배하는 섬들에서 몇 가지 이점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전쟁은 대체로 결정적인 승패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1754년의 " 7년전쟁"이 시작될 당시 프랑스는 북아메레카에서 계속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 이 무렵 프랑스는 캐나다와 5대호 주변의 몇몇 인디언 부족들과 강력한 유대를 확립하고 있었으며, 미시시피강을 차지하고, 그리고 그에 따라 연결되는 요새와 교역소를 줄줄이 설치하였기 때문에 캐나다의 퀘백으로부터 미시시피강 하구의 뉴올리언스까지 획을 그어 큰 반달 모양의 방대한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영국이 차지한 땅은 애팔래치아 산맥 동쪽의 좁고 긴 지대에 국한되었다. 프랑스는 비단 대영제국 뿐아니라 아메리카 식민지까지도 위협할 태세에 있었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영국의 서부로의 진출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754년 지금의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던 뒤끄슨 요새에서 일단의 프랑스 정구군인과 버지니아 민병대간의 무력 충돌 사건이 일어났다. 이 버지니아의 농장주이자 측량사인 당년 22세의 조지 워싱턴의 지휘하에 있었다. 런던에서는 영국의 상무성이 뉴욕,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 및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이 충돌사건을 다루려고 시도했다.
6월19일부터 7월10일까지 세칭 '올바니의회'가 이로키 인디언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영국인들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얻어내기 위해 뉴욕 올버이에서 이로키 인디안의 대포들과 회동했다. 이 회의의 대표들은 또한 아메리카 식민지의 연합체가 "이들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절대로 필요하다"고 선언하고, '올버니 연방안'을 채택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기초한 이 연방안은 왕영으로 임명된 총독, 각 식민지의 의회가 선정한 대의원으로 구성된 대입법행정안원회를 구성하되, 각주는 재무성에 납부하는 금액에 비례하여 대의원을 내보낼 수 있게 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기구는 방위, 대인디안 관계, 그리고 교역과 서부의 정착문제를 관장하는 것은 물론 조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프랭클린의 이안을 수락한 식민지는 하나도 없었다. 어느 식민지도 조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한과 서부의 개발에 대한 통제권을 중앙 당국에 양보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우세한 전략적 위치와 유능한 지도층으로 해서 '7년전쟁'은 마침내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의 극히 일부만이 서반구에서 치러졌다. 1763년에 체결된 파리 강화조약으로 프랑스는 캐나다의 전부, 5대호 그리고 미시시피강 상류지역을 영국에게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북아메리카에 프랑스 제국을 건설하려는 꿈은 거의 무산되다시피했다. 프랑스에 승리한 영국은 이제 지금까지 소홀히 했던 문제, 즉 그 광대한 식민지의 통치에 눈을 돌려야했다. 영국정부 당국은 방위를 용이하게하고, 서로 다른 지역과 주민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저정하고, 행정의 비용을 균등하게 나눌 수 있도록 이 광대한 식민지를 조직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북아메리카를 차지함으로써 영국의 영토는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지금까지의 대서양 연안의 좁고 길쭉한 땅에 광활한 캐나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제국을 형성할 수 있을 만큼 큰 미시시피강과 앨리게이니 산맥 사이의 광대한 영토가 추가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