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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5월에 못다 부른 노래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4-05-13 17:04:33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최 모세( 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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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모세(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5월이면 생각나는 옛사람이 있다. 어느덧 30년이 지난 한국에서 가슴 아픈 사연의 추억이다.

클래식 음악 전문점을 경영하고 있었던 어느 날 오후 쇼윈도 밖으로 흐르는 음악은 <5월의 어느 날> 그리스 성악가 “아그네스 발차”가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이었다. 가사 내용은 <5월의 어느 날> 전쟁터에서 전사한 아들의 지난날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어머니가 부르는 처절한 노래이다. 

열어 놓은 출입문을 통해 음악이 밖으로 흐를 때 지나치던 발걸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노래를 듣던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음악이 진한 여운을 남기며 끝나자 그가 실내로 들어서는 순간 첫인상은 온화하고 신선했다. 

청바지와 검은 슈트 차림에 올백으로 쓸어올린 머리 스타일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 미소를 지으며 다가서자 ‘저는 ㅇㅇ 학원의 영어 강사 김ㅇㅇ입니다’라고 먼저 활달하게 자신을 소개한다. 한눈에 교양 있고 인품이 뛰어난 사람임을 알 수가 있었다. 서로 통성명을 마친 후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궁금해 질문하는 음악은 그리스의 가요이고 그리스 태생의 성악가 “아그네스 발차”가 노래했으며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헤로인’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는 가창력이 뛰어난 성량이 놀라우며 노래가 애절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음악 감상에 대한 이해력이 남다르다는 생각에 이내 호감이 갔다. 

CD 재킷의 노래하는 모습이 실린 사진과 영어 가사 내용을 보여주며 번역을 부탁했다. 이내 번역하는 영어 실력은 출중하고 유창해 어휘 선택의 깊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번역한 내용을 보면서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칭송하자 손사래치며 겸손의 모습을 보인다. K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 미국 유학 후 결혼해 살다가 혼자 귀국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가 번역한 <5월의 어느 날>의 가사를 기억을 살려 옮겨 본다.

“5월의 어느 날 너는 떠나 가버렸지 아들아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봄날에 나는 너를 잃었구나. 너는 테라스에 올라서서 너의 눈 속 가득히 햇빛을 받아들이곤 했었지. 우리가 함께한 어느 날 너는 달콤한 목소리로 네가 동경하는 큰 세상에 대해 내게 얘기하고 약속도 했었지, 그러나 네가 사라진 지금 나의 빛도 또한 사라져 가는구나.”

“아그네스 발차”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절제된 감정으로 노래하고 있다. 절창의 이면에 어머니의 처절한 통곡이 짙게 배어있다. 심금을 울리는 가사 내용과 어머니의 애끓는 노래가 절절해 비장미가 넘친다.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가 엄청난 성량으로 무한한 감동을 선사하는 곡이다.

“아그네스 발차”의 <내 조국이 가르쳐 준 노래> CD에 수록된 여러 곡은 그리스가 터키, 독일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리스인들의, 저항의 시에 붙인 노래이다. 

그는 음감이 뛰어나 이내 <5월의 어느 날>의 멜로디를 익혀 구수하게 흥얼거렸다. <기차는 떠나가네> 등 몇 곡을 흔쾌히 번역해 주었다. 

어느새 2년 연배인 그와 허물없는 사이로 가까워졌다. 그는 순수하고 맑은 웃음의 사람이었다. 경청의 태도가 진지했고 상대를 존중하며 배려하는 마음이 깊었다.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영문학 고전의 영화를 좋아하는 취향에 있었다. 삶의 가치 추구에 대해 주고받는 진솔한 대화는 생명력과 기쁨이 넘쳤다. 

따뜻한 심성을 지닌 그를 신뢰하는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그가 굴곡진 삶을 살아왔을 성싶은 궁금증이 있었으나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역린(逆鱗)인 삶의 가장 큰 아픔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 선생님은 강의가 끝나고 8시 퇴근 시간 무렵이면 나의 샵을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다. 퇴근길에 저녁 식사 후 같이 은평구 집 근처 아내의 영업장으로 달려가 교대를 하고서 자유롭게 친교의 시간을 이어갔다. 영업장은 동네 대학생들과 성인들의 친교 모임의 오락 시설이었다. 

그와 함께 하는 수개월 동안 그는 내 집 2층 서재에 머물게 되었다. 주일에는 같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으나 교회의 낯선 언어와 익숙하지 못한 분위기가 매우 거북하다 했다. 예배는 불참석해도 선물 받은 성경 찬송가를 보면서 신앙심을 다지겠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가 지닌 삶의 성실성에 신뢰감은 더욱 깊어갔다.

주말에 아내의 역할이 더 필요할 때는 영업장 한쪽에서 나도 김 선생님과 학생들의 토론에 참여했다. 그의 강의와 토론의 주제는 19세기 미국의 고전 문학의 정수인 롱펠로우(1807)의 서사시 [에반젤린] [인생 예찬] 호손(1804)의 [주홍 글씨] 멜빌(1819)의 [백경 Moby Dick]은 영화화된 작품이었다. 부드러운 화술로 이끌어가는 영혼의 울림이 실린 강의에 학생들의 호응은 열띤 분위기이었다.

어느 날 그가 강사직을 그만두고 잠시 아내의 영업장에서 잠만 잘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서둘러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될 대전의 친구가 경영하는 주유소로 옮겨갔다. 한 달에 한 번 휴일에 그는 연세대학 서교수(동창) 신촌의 집을 방문하기 전에 레코드 샵을 들리곤 했었다. 

어느 날 나에게 이제는 성경책을 되돌려주겠다고 하며 기어이 놓고 갔다. 그리고 얼마 후 서 교수님으로부터 놀라운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가 심장마비로 삶을 마감했다는 비보에 숨이 멎는 듯했다. 그날의 만남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서 교수의 덧붙이는 말은 그곳 생활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이 더 컸다. 삶의 가치관의 균형과 합리성을 추구했던 그는 현실에서 합리성을 기대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도한다는 일념에 그의 고통스러운 삶의 실상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자신의 위선과 한계성으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한순간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했던 사랑의, 정신의 실기(失機)는 깊은 회한이 되었다. 그에게는 쉴 곳이 필요했었다. 그것을 외면했다는 자책감에 오열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지금 그의 나직한 바리톤 음성의 못다 부른 5월의 노래는 짙은 향취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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