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재의 식사 - 여름 라면 삼국지
바로 며칠 전, 팔도비빔면을 끓여 먹고 새삼 절감했다. 아, 지금이 여름 라면 먹기에 딱 좋은 계절이구나. 본격적인 여름은 아니지만 기온은 제법 올라가는 가운데, 수전의 찬물은 냉기를 잃지 않으니 삶은 면을 꼬들꼬들하고 시원하게 헹굴 수 있다. 그리하여 수돗물이 미지근해 얼음의 힘을 빌려야만 하는 한여름보다 지금이 여름 라면의 제철이다. 올해는 또 어떤 여름 라면이 식탁에 오를까? 확률상 시장 점유 부동의 1위인 팔도, 특히 비빔면일 가능성이 늘 높지만 변덕스러운 소비자의 마음은 마트의 매대에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경쟁사들이 조금의 시장 점유율이라도 가져오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신제품을 내놓고 있고 실제로도 먹히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로 계절이 갈수록 길어지는 만큼 더 자주 먹게 될 여름 라면의 역사를 살펴보자.
라면회사로서 팔도가 독립해 나온 한국야쿠르트는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던 군인 출신의 윤덕병이 창업했다. 윤덕병은 폭증하는 한국의 밀가루 소비를 바탕으로 향후 한국인이 밥보다 라면을 더 많이 먹을 거라 예측한다. 그리하여 1982년 일본의 이찌방 식품과 기술 도입 계약을 맺고 1983년 이천 공장을 설립해 9월 팔도라면을 출시한다.
첫 출시 제품은 팔도라면 3종(쇠고기·크로렐라·참깨)이었는데 특히 ‘참깨’는 이후 비빔면에도 영향을 미치는 액상 수프를 국내 최초로 도입한 라면이었다.
팔도의 라면은 결이 상당히 달랐다. 1963년 등장한 이후 쭉 성공가도를 걸어왔었던 빨갛고 얼큰한 국물 바탕이 아니었던 가운데 클로렐라처럼 면에도 해당 성분을 첨가해 반죽함으로써 색깔이 녹색인 제품마저 있었다. 당시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라면이라는 음식에 익숙해져 정형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포장의 미학마저 현저하게 달랐던 팔도의 제품은 좋은 반응을 거두지 못했다.
첫 제품군 삼총사는 성공작이라 할 수 없었지만 팔도는 이듬해인 1984년, 바로 만회를 위한 발걸음을 내디딘다. 바로 이 모든 여름 라면의 존재를 가능케 한 비빔면을 출시한 것이다. 팔도비빔면은 여러모로 화제가 될 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일단 비빔소면을 인스턴트화했다는 정체성 자체부터가 독특했다.
보통의 라면은 그 자체로서 새로웠지만 비빔면은 이미 친숙한 음식을 좀 더 간편하게 다듬어 심리적인 장벽을 한층 더 낮췄다. 녹색 면발과 국물의 클로렐라 라면을 내놓은 신생 및 후발 업체의 제품으로서 참신함과 친숙함,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시도였다.
비빔면 인스턴트화의 핵심은 액상 비빔장이었다. 참깨라면의 특징이었던 액상 수프는 일단 제형부터 초고추장을 닮아 친숙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출시 40주년을 일 년 남겨둔 지금까지도 경쟁사가 정확히 복제할 수 없는 맛을 지니고 있었다. 혀 끝을 기분 좋을 정도로만 자극하는 매운맛에 감각적인 신맛, 그리고 조금 지나친 건 아닐까 생각이 드는 감칠맛의 삼박자가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
물론 이게 전부도 아니었다. 제품 자체의 매력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어떻게 알리느냐, 즉 홍보 또한 관건이었다. 이에 팔도는 두 갈래로 접근했다. 첫 번째는 광고였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개그맨이자 팔도의 전속이었던 심형래에 최양락을 붙여 텔레비전에 내보냈다.
여기에 팔도비빔면이 사라지더라도 영원히 각인될 광고 문구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가 따라 붙음으로써 하나의 현상이 완성된다. 이 광고 문구는 텔레비전을 넘어 신문 등에도 안착해 비빔면의 인기에 일등공신이 된다.
두 번째로는 야쿠르트 판매사원을 통한 보급이었다. 중장년 여성이 대다수이기에 야쿠르트 ‘아줌마’라 불리는 이들은 요즘 용어로 치자면 'B to C(Business to Consumer)’ 즉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는 개별 가정 판매 요원들이었다.
이들이 동네 미장원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영업활동을 펼친 덕분에 비빔면이 소비자들에게 알려지고 오늘의 입지를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이야기만 늘어 놓으면 비빔면이 출시와 동시에 시장에 안착해 오늘날까지 세월이 흐른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특히 출시 초기, 포장의 조리법을 읽지 않고 보통 라면처럼 끓여 먹었다가 뜨거운 맛(?)을 본 소비자들의 항의가 상당했다고 한다.
이처럼 틈새를 잘 노려 창립 이후 두 번째 제품이 고전으로 자리를 잡아버렸지만, 40년에서 1년 빠지는 세월 동안 팔도비빔면은 끊임없는 경쟁을 치르고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치열해지는 여름 라면 경쟁의 서막은 1991년 삼양이 올렸다.
농심과 더불어 라면 업계의 영원한 양강이자 한국 라면의 원조인 삼양이지만 1980년대 말부터 상황이 전혀 호의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후발주자인 농심에 업계 1위 자리를 내주기 시작하더니 1989년에는 우지파동으로 점유율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이다.
이미 농심은 만회할 수 없어져버린 상황, 삼양은 팔도라도 잡아보겠다는 심산으로 1991년 ‘열무비빔면’을 출시한다.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현역으로 남아 있는 걸 보면 열무비빔면도 나름 성공했노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팔도의 아성을 뚫고 일등을 차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후 삼양은 2016년 ‘프리미엄’을 표방한 ‘갓비빔’을 출시했지만 당시 가격이 1,500원대로 일반 비빔면보다 2~3배 비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올해 4월 삼양은 사과, 매실, 배, 파인애플의 4종 과일로 맛을 낸 비빔장의 ‘4과 비빔면’을 출시해 다시 한번 도전한다.
삼양이 도전장을 내민 바로 이듬해, 즉 1992년 농심도 여름 라면 시장에 뛰어든다. 그동안 여름 라면 없이도 업계 1위를 누려왔었던 농심은 역시 자신들만의 제품 2종을 내세운다. 바로 ‘쑥’과 ‘도토리 비빔면’이었다. 팔도비빔면과는 결이 달랐던 제품의 시장 안착을 위해 농심은 당시 간판 모델이었던 강부자를 내세워 광고를 대대적으로 진행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서 무료 시식회도 열었다.
맛이 나쁘지 않았지만 팔도의 비빔장이 보여주었던 맛의 ‘임팩트’, 즉 개성 있는 한방은 보여주지 못했던 무난한 제품이었다. 결국 팔도비빔면의 왕좌를 노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삼양의 열무비빔면과 달리 진작에 단종되었다.
이처럼 비빔면에서는 다른 제품과 달리 압도적인 상과를 거두지 못한 농심은 2005년의 ‘찰비빔면’을 거쳐 2020년 다른 면발의 개성을 내세운 ‘칼빔면’, 2021년에는 배, 홍고추, 동치미 양념장의 ‘배홍동’으로 계속해서 도전하고 있다.
또한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2008년 출시된 이후 자신만의 틈새 정도는 확보하고 있는 ‘둥지냉면’도 있다. 유명 냉면집을 돌며 국물을 맛보고 또한 몰래 가져와 분석해 만들었다는 둥지냉면은 농심이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약진하는 오뚜기가 있다. 1987년 청보식품의 자산을 인수해 시장에 진출한 오뚜기는 2013년 하반기, 삼양을 제치고 라면 시장 점유율 2위로 올라선다. 그런 기세에 걸맞게 오뚜기의 여름 라면도 꾸준히 약진 중이다.
2010년대로 접어들며 ‘메밀비빔면’으로 시장에 진출한 이후 프리미엄 제품군인 ‘함흥비빔면’과 ‘콩국수라면’에 이어 2018년에는 ‘진짜 쫄면’, 2020년에는 ‘진비빔면’을 출시했다. 특히 진비빔면은 백종원을 내세워 출시 3주 만에 500만, 2개월 만에 2,000만개를 판매했다. 닐슨코리아에 의하면 2022년 비빔면 시장 점유율은 팔도 53.3%, 농심 19.1%, 오뚜기 11.4% 순이다. 과연 올여름의 판도는 또 어떻게 될까?
<이용재 음식 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