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결국 ‘박쥐’가 원흉이었나. 세계보건기구(WHO)가 중국 우한으로 날아가 현장 조사까지 한 뒤에 내놓은 120쪽짜리 ‘코로나19 기원 보고서’가 빈 껍데기나 다름없어 거센 후폭풍이 일고 있다.
기존 가설에서 나아간 새 정보가 전혀 없을 뿐더러, 논란이 됐던 ‘우한 실험실 유출설’을 일축함으로써 사실상 중국에 면죄부만 준 꼴이 됐다. 가뜩이나 결과 발표가 한 달이나 지연돼 자료 투명성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커졌다. 미국과 중국은 이번 조사 결과를 놓고 또 다시 대립각을 세우며 첨예한 진영 갈등을 예고했다.
WHO가 지난달 30일 발표한 보고서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박쥐에서 동물 숙주를 거쳐 인간에게 전파됐을 가능성이 가장 높고 ▲우한 실험실에서 직원 감염 등을 통해 밖으로 유출됐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게 핵심이다. 실험실 유출설은 ▲박쥐에서 인간으로 직접 전파 가능성과 ▲냉동식품 운송을 통한 전파 가능성보다도 심지어 더 낮게 평가됐다.
그렇다면 유력 가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라도 내놨어야 하는데 그조차도 없었다. 조사팀은 코로나19 발원지가 우한 화난시장이 아닐 수 있다는 의견도 보탰다. 결론적으로 코로나19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모르겠다는 얘기다.
아무 소득은 없고 의문만 증폭시킨 조사 결과에 비판이 쏟아졌다. 뉴욕타임스는 “보고서는 새로운 통찰력을 담고 있지 않다”고 혹평했고, 월스트릿저널(WSJ)도 “WHO 조사 결과는 기다릴 가치가 없었다”고 일갈했다. 중국의 조사 방해 의혹도 더 불어났다. 매튜 캐버나 조지타운대 교수는 성명에서 “중국 정부가 필요한 모든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며 “중국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한 확고한 결론을 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꼬집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 역시 이번 보고서가 부실하다는 사실을 에둘러 인정했다. 그는 “실험실 유출 가능성이 가장 낮다고 결론 지었으나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며 “조사팀을 배치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다만 조사팀을 이끈 벤 엠바렉 박사는 “팀원들이 정치적 압력에 직면했다”면서도 “보고서에서 중요 요소를 삭제하라는 압박은 없었다”고 외압설을 부인했다.
신난 건 중국 정부뿐이다. WHO의 조사 결과를 크게 환영하고는 즉각 공세로 돌아섰다. 중국 외교부는 “국내외 전문가들이 보여준 과학, 근면, 전문성에 찬사를 보낸다”면서 “코로나19 기원을 밝히는 일은 전 세계적인 임무로 더 많은 나라와 지역에서 진행해야 한다”고 화살을 외부로 돌렸다. 또 “이 문제를 정치화하는 행위는 방역 노력을 파괴할 것”이라며 경고장까지 날렸다.
민주국가들은 한 목소리로 맞섰다. 한국과 미국 등 14개국 정부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연구가 상당히 지연되고 완전한 원자료와 샘플에 대한 접근이 부족했다”며 추가 연구를 촉구했다. 백악관도 보고서 내용이 코로나19가 세상에 미친 영향의 수준에 걸맞지 않다고 맹비난했다.
WHO 조사 결과는 미중갈등 전선만 한층 넓혀 놨다는 평가다. WSJ는 이번 조사가 ‘중국 면죄부’였다는 뜻에서 “우한 화이트워시(Whitewashㆍ더러운 곳을 가리는 행위)”라고 논평하며 “조 바이든 행정부가 다자간 기관을 활성화하기 바란다면 WHO의 화이트워시를 거부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경 대응을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