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 레이건 행정부의 가장 심각한 외교정책 문제가 발생했다. 1987년에 미국민들은 이란의 호메이니 정부가 조종하고 있는 과격한 단체들이 레바논에 억류하고 있는 미국인 인질들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한 한 시도로서 행정부가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판매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사를 해본 결과, 이 무기판매 대금이 의회가 이러한 군사원조를 금지하고 있던 기간 중에 니카라과의 콘트라에게 전용되었다는 사실도 나타났다.
그 후 상하양원합동위원회에서의 이란-콘트라 청문회들에서는 중동 및 중미 지역에서의 미국 외교정책 이익을 정의하는 폭넓은 문제와, 아울러 대이란 무기 판매의 불법성 유무 문제가 심의되었다. 광의로 볼 때, 이란-콘트라 청문회들은 14년 전의 상원 워터게이트 청문회와 마찬가지로, 국민에 대한 정부의 책임 문제와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적절한 균형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미국은 주식시세가 22%나 폭락하여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이 뒤따른 1929년의 엄청난 주식시장 붕괴를 즉시 상기시킨 소위 "불길한 월요일"인 1987년 10월 19일 경제침체의 고통을 당했다. 이러한 주식시장 붕괴는 미국 국제무역 적자 및 연방정부 예산 적자에 대한 걱정, 법인 및 개인 채무의 높은 수준에 대한 염려, 그리고 특정 상황이 발생할 경우 컴퓨터가 대량의 주식의 매입이나 매각을 자동적으로 명령하는 "프로그램 거래"로 알려져 있는 새로운 주식시장 기술혁신 등이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괄목할 만하게 단기간에 회복되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주식시장으로부터 보다 더 안전한 형태의 투자쪽으로 옮겨갔으며, 경기후퇴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제로, 경제 성장은 지속되었으며, 1988년 6월 실업율은 14년만에 5.2%로 떨어졌다.
대통령직에 오른 조지 부시
레이건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 인기가 매우 높았었지만, 미국헌법에 따라서 1988년에 다시 출마할 수 없었다. 8년 동안 그의 부통령으로 재직했던 그의 정치적 후계자인 조지 부시는 레이건의 인기 덕을 크게 봤으며, 41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부시는 레이건 대통령이 초래한 번영의 계속을 유권자들에게 약속하고 선거운동을 했으며, 자기의 전문지식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마이클 듀카키스보다 더 낫게 미국 방위를 강력하게 뒷받침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매사추세츠 주지사 듀카키스는 불우한 미국민들이 경제적으로 해를 입고 있으며, 정부는 연방정부 채무 및 방위지출을 억제하는 한편, 이러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민들은 새로운 증세가 없을 것임을 약속하는 부시 후보의 메시지에 마음이 훨씬 더 끌렸다. 선거에서 부시는 54% 대 46%의 일반투표 差로 승리했다.
부시 대통령은 첫 임기중에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계획에 충실한 세제, 지출, 채무 정책들을 추구함으로써 보수주의적인 재정 계획을 따랐다. 그러나, 터무니없이 방대한 예산적자와 적자감축 원칙으로 해서, 부시 대통령은 정부지출 삭감을 요구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새로운 예산 항목들을 거의 허용할 수 없는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정부에게 비용이 가장 적게 들게 하는 행정부 정책들만이 가장 잘 진척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환경보호 및 교육 문제들, 즉 민간산업과 지방자치체 및 주정부가 그 대부분의 비용을 지불하는 문제들에 관해서 정책 변경책을 내놓았다. 1990년 11월 부시 대통령은 도시 스모그, 자동차 배기가스, 유독성 대기오염, 산성비 등에 관한 새로운 연방 기준을 시행하되, 그 비용의 대부분은 산업측의 오염자들이 부담하도록 하는 포괄적인 법안에 서명했다. 그는 신체장애자들을 위해 공공건물 등에 신체장애자들이 접근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확보해주되, 그 비용은 기업체에게 부담시키는 법안에 서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한 자발적인 사회적 선행, 즉 그의 기억할 만한 문구인 이른바 "수많은 자선의 불빛"(a thousand points of light)을 권장하는 운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