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유 대체유의 역사
d 가끔 잊고 산다. 이 세상이 성인 위주로 돌아간다는 사실 말이다. 음식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노키즈존' 관련 뉴스가 불거져 나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부끄럽게도 이 연재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성인 위주로 음식의 역사를 소개해왔다. 내가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 무지한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반성하는 마음으로 오늘은 모유 대체유의 역사에 대해 살펴본다.
■기원이 된 와바나키 원주민의 분유
오늘날 모유 대체유는 가루 형태의 조제 분유이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조제 분유란 ‘우유에 영유아가 필요로 하는 각종 영양소를 첨가해 건조한 뒤 분말로 만든 것'이다. 영양소의 첨가 부분이 ‘조제(modified 또는 fortified)'이고 분말화했기에 '분유(milk powder)'인 것이다.
조제 분유의 역사는 172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뉴햄프셔주의 엘리자베스 핸슨(1684~1737)이 와바나키 원주민에게 납치됐는데, 원주민들이 견과류와 옥수수가루(콘밀)를 섞어 만든 분유를 아기에게 먹였으며 자신에게도 조제법을 가르쳐 줬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전에 인류가 영유아에게 친모의 모유만 철저하게 고집했던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식이 아닌 영유아에게 젖을 먹이는 유모의 역사는 기원전 2000년부터 최근, 그러니까 20세기까지 약 4,000년 동안 지속됐다. 소, 염소, 당나귀, 낙타, 돼지, 말 등의 젖은 모유 대체유로 쓰였다. 이를 위한 젖병 또한 고안돼 사용됐으며 재질도 도기, 주석 등의 금속을 거쳐 계속 발전했다.
영유아를 위한 인조 액상식이 최초로 발명된 건 1865년이다. 당시 서구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문화적 변화, 위생 등의 이유로 유모에게 수유를 의존하는 경향이 조금씩 기세를 잃기 시작했다.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에서 유모를 고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애초에 유모를 도입한 것이 주로 생활 수준이 풍족한 계층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하다.
고무 젖꼭지의 발명은 동물의 젖이 인간 모유 대체유로 활용될 길을 넓혔다. 1840년대 고무의 발명 이후 5년 뒤 미국 뉴욕의 일라이자 프랫은 ‘인도 고무 젖꼭지'의 특허를 출원했다. 하지만 당시의 고무는 부드럽다는 장점에 비해 악취, 약한 내구성 등의 단점이 두드러졌다. 20세기로 접어들며 고무 품질이 개선될 때까지 고무 젖꼭지는 현재의 입지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과거의 모유 대체유는 의학적, 영양학적으로 체계적이었을 거라 보기 어렵다. 1846년 과학자와 영양학자들은 모유 대체유를 먹인 영유아의 높은 질환 발생률과 사망률 등에 주목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개선된 모유 대체유의 연구 수요로 이어졌으니, ‘유기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독일 과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1803~1873)가 최초의 결과물을 고안해 냈다.
■손녀를 생각한 유스투스 폰 리비히
이는 사연이 가득한 발명이었다. 1864년 리비히의 딸 요한나는 손녀 카롤리나를 낳았는데 모유 수유에 어려움을 겪었다. 앞서 언급했듯 당시 유모의 고용은 조금씩 기피되는 분위기여서 요한나 또한 원하지 않았다. 딸과 손녀를 위해 리비히는 대체유를 개발했고, 덕분에 손녀 카롤리나가 살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개인적 목적으로 개발한 대체유였고 그로부터 어떤 이득도 취하지 않았지만, 리비히의 대체유는 입길에 올랐다. 무엇보다 효능과 성과를 다른 과학자들이 믿지 않았다. 프랑스 의사 장 안느앙리 드폴은 인체 실험에 나섰다. 모유 수유를 할 수 없는 여성들이 낳은 아이 4명을 모아 리비히의 대체유를 먹였다.
첫 대체유는 리비히가 조제 과정에 직접 참여했지만 실험 결과는 나빴다. 아이 4명이 모두 나흘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드폴은 실험을 멈추고 결과에 대해 함구했다. 이후 프랑스 국립의학회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리비히의 대체유가 의제로 올라 혹평을 받자, 드폴은 실험 결과를 털어놓고 만다. 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편을 갈라 각각 드폴과 리비히를 옹호했다.
리비히의 ‘아기를 위한 분유'는 최초의 상업적 조제 분유로 역사에 남았고, 이후 영국의 멜린스 푸드의 조제 분유(1866), 다국적 기업 네슬레의 조제 분유(1867) 등이 뒤를 이었다. 우유를 바탕으로 보리 추출액, 밀가루 등을 더해 분말로 만든 제품이었다. 리비히의 분유와 마찬가지로 이 제품들은 출시 초창기에 영양과 안전에 대한 불신에 시달렸다. 20세기 초까지는 의사들이 주도하는 가정 조제 대체유의 레시피가 인기를 끌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소아과의사 토마스 모건 로치(1849~1914)의 조제 대체유 제조법인 백분율법이었다. 우유에 물, 크림, 설탕, 꿀 등을 일정 비율로 섞어 모유에 가장 가까운 대체품을 만든다는 개념이었다. 당시엔 대부분 가정에서 모유 수유를 했지만 모유 수유 여건이 안 되는 일부 가정에선 백분율법 대체유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 또한 위생 불량, 괴혈병·구루병 발병 우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920~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는 연유가 대체유의 대세였다. 동시에 과학 발전을 바탕으로 모유를 좀 더 정확하게 분석하려는 시도가 계속됐다. 엿당과 덱스트린이 영양 면에서 중요하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고, 1912년 미국 미드 존슨사는 처방전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우유 첨가제 덱스트리말토스를 출시했다. 1919년에는 대체유 유지방을 다른 동물성·식물성 지방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현재까지 통용되는 조제 분유가 등장한 건 1920년대 말이다. 미국 하버드 의대의 유화학자 알프레드 보스워스와 보스턴의 소아과 의사 헨리 바우디치가 시밀락(Similac·‘수유와 흡사한 simliar to lactation'의 줄임말)을 개발했다. 시밀락은 DHA, 루테인, 비타민E, 뉴클레오타이드, 항산화제, 프리바이오틱스 등을 함유한다.
오늘날 조제 분유는 영유아 음식 시장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 2022년 기준으로 전 세계 시장 규모는 710억 달러(약 95조 원)에 이른다. 그러나 모유 수유 옹호론 또한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세계보건기구(WHO)나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 보건복지부 등은 공중보건에 더 이롭다며 모유 수유를 장려한다.
■90% 넘던 국내 분유 점유율 70%대로
한국에서 조제 분유는 1967년에 첫선을 보였다. 남양유업이 1964년 창립 후 충남 천안에 분유 공장을 세우고 3년여 만에 제품을 출시했다. 이후 매일유업이 1974년 두 번째로 조제 분유 시장에 뛰어들었다. 1962년 2월 농어촌개발공사가 설립한 한국낙농기공이 전신인 매일유업은 일본 모리나가유업과 기술 제휴를 통해 맘마분유를 생산했다.
1987년 설립됐다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여파로 부도가 나 현재는 롯데푸드 소속인 파스퇴르유업도 분유를 제조한다. 일동후디스는 뉴질랜드에서 산양 분유를 생산해 수입 판매한다. 4개사의 제품이 국내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지만 수입 분유의 비율이 상승하면서 2022년부터는 70% 중반대로 내려앉았다.
한국 분유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전국 우량아 선발 대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분유 마케팅을 위해 1971년 남양유업이 처음 주최한 전국 우량아 선발 대회엔 바둑기사 이창호, 작곡가 주영훈, 아나운서 윤현진 등이 참가한 것이 화제가 됐다. 그러나 1983년 중단됐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군부 독재 정권이 사람 많이 모이는 행사는 하지 말라고 압박을 넣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