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서 낭독 33인 민족대표 최성모 목사
지금으로부터 105년 전인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이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삼창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기독교 감리교인 대표로 참여한 최성모 목사도 있었다. 태화관으로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최성모 목사는 2년6개월간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왜 독립선언에 참여했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그는 “권유를 받고 참여한 것이 아닌 기뻐서 자진해서 참가했다”고 당당히 말했다.
잊혀져서는 안 되는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자 독립지사였던 최성모 선생, 조국의 독립에 앞장섰던 그의 뜻을 그 누구보다 가슴에 새기는 미주 한인이 있다. 바로 뉴저지주 버겐필드에 거주하는 증손자 최선일(75)씨다.
최씨는 본보와의 3.1절 105주년 특별 인터뷰에서 “증조부의 삶을 돌아보며 독립유공자가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1873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최성모 목사는 1884년 14세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됐다. 선비로의 삶을 살던 그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정세가 혼란해진 시기에 우연히 남대문에 있던 상동교회 앞을 지나다 전덕기 목사의 시국강연을 듣고 기독교인이 됐다. 1913년 신학교를 졸업 후 감리교 목사가 됐고 만주와 해주 등에서 선교 및 목회 활동에 전념하는 동시에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정신 및 독립사상 고취에 노력했다.
1919년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전해 듣고 적극 호응해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른 그는 1921년 출옥한 뒤에도 독립운동과 전도에 헌신했고 1936년 63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증손자 최선일씨는 최성모 목사가 별세한 후인 1947년 태어났다. 최씨의 뉴저지주 버겐필드 자택에는 독립유공자인 증조부의 자취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최씨가 “우리 가문의 가보”라며 1921년 경성감옥 출옥 당시의 최성모 목사와 아들 최경환씨가 함께 찍은 사진을 건넸다. 또 1917년 4월 최성모 목사의 모습이 담긴 독사진도 찾아볼 수 있었다. 최씨는 “언론에 처음 공개하는 사진”이라고 말했다.
최선일씨는 1970년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왔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는 최성모 목사의 후손이 없고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한국 정부의 무관심을 반드시 바로 잡고 싶다는 것.
최씨는 “증조부는 경기도 양주시 교현리에 있는 선산에 묻혔다. 하지만 80년대에 선산이 있던 토지는 정부에 의해 반강제로 수용돼 예비군 훈련장으로 변모됐다. 3.1운동 민족대표의 묘소가 볼썽사납게 방치된 것”이라며 “후손들의 간곡한 요청에 2006년 증조부의 묘소가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됐지만 당시 국립 서울 현충원에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대전 현충원으로 가게된 것이 많이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선산에는 가문 선조들의 묘소들이 여전히 있다. 지난 2010년께 선산을 방문했을 때 훼손된 묘역을 보여 너무나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최씨는 “후손이 해외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의 묘지가 있던 토지가 훼손되고 이렇게 잊혀져서는 안 된다”며 “미주 한인들이 독립지사 후손의 간절함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목소리를 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조국 독립을 위해 삶을 바친 민족대표 최성모 목사가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우리의 후손에게 계속 기억될 수 있도록 한인들이 힘을 모아달라”고 강조했다.
<서한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