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최저시급 인상
“당연히 알고 있죠. 그런데 별로 기쁘진 않네요.”
지난 23일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의 한 유명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직원 호세 코르테즈에게 ‘4월부터 최저 시급이 20달러로 인상되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 돌아온 답이다. 급여가 늘어난다는데 기대가 안 된다는 말이 의아해 그 이유를 되물으니 시큰둥한 대답이 이어졌다. “지금도 우리는 그 이상을 받고 있어요. 최저 시급(현 16달러)을 준다고 하면 아무도 여기서 일하지 않을 테니까요. 여기선 그 정도만 벌어서는 절대 살 수 없어요.” 실리콘밸리의 중심인 새너제이는 물가가 높기로 미국 내에서 손꼽히는 곳이다. 최저 시급만 주겠다 하면 직원을 구하기가 어려워 그보다 높은 시급을 지급하는 게 보통이라고 한다.
오히려 코르테즈는 기대보다 걱정이 더 크다고 했다. 최저 시급이 오르면 근무 인원을 줄여 노동강도가 더 세질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점포는 코로나19 팬데믹 때 직원을 절반 가까이 줄였는데, 팬데믹이 끝나면서 고용을 다시 늘리긴 했어도 팬데믹 이전 수준을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직원 수가 줄어든 만큼 남은 직원들의 업무량은 당연히 늘었다. “최저 시급이 오르면 그걸 이유로 사람을 더 줄일 거예요. 벌써 줄인 지점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곧 우리 얘기가 될지도 모르죠.”
캘리포니아주가 4월 1일부로 패스트푸드 체인 노동자들의 최저 시급을 인상한다. 현재 시간당 16달러(약 2만1,300원)인 최저 시급이 20달러(약 2만6,630원)로 오른다. 지난해 15.5달러였던 게 올해 1월 16달러로 소폭 인상됐는데, 불과 넉 달 만에 4달러가 더 오르는 것이다. 인상률은 25%. 한 번에 25%가 오르는 것은 미국에선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다.
전면적 인상을 한 달여 앞둔 요즘, 캘리포니아 주민들의 표정은 복잡하다. 생계비 벌기도 버거운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지만, 코르테즈처럼 악영향을 걱정하는 이도 많다.
패스트푸드 체인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캘리포니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문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미 상당수 패스트푸드 업체가 최저 시급 인상에 따른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메뉴 가격 인상을 예고한 데다, 다른 업계나 주로도 연쇄적 임금 인상을 부를 가능성이 크다. 미국 전체 외식 매출의 약 14%를 차지하는 캘리포니아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임금 인상 요구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얘기다.
급격한 최저 시급 인상은 한국인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슈다. 먼저 겪은 한국에선 저임금 노동자들 급여가 전반적으로 오르는 긍정적 효과가 있었으나, 오히려 해당 분야 일자리가 줄어들고 소규모 기업 및 자영업자들의 경영 부담을 가중시키는 등의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캘리포니아는 다를까. 그 끝은 공생인가, 공멸인가. 캘리포니아의 실험에 미국인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최저 시급, 25%나 올리는 이유는
캘리포니아의 최저 시급은 적은 편이 아니다. 미국 내에서 세 번째로 많은데, 일부 자치단체는 주정부가 정한 시급보다도 높게 책정하고 있다. 최저 시급이 가장 많은 도시는 웨스트할리우드로 시간당 19.08달러다. 연방 최저 시급(7.25달러)의 2.5배가 넘는다.
안 그래도 높은 최저 시급이 25%나 더 인상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이렇게 받아도 캘리포니아의 고물가를 감당하기 힘든 게 현실이어서다. 현재 캘리포니아 패스트푸드 노동자의 평균 연봉은 3만4,000달러(약 4,527만 원)로, 최저 생계비(약 5만6,000달러)에 한참 못 미친다. 노동환경도 열악하다. UC버클리노동센터 연구에 따르면 패스트푸드점 직원의 87% 이상이 1년에 한 번 넘게 근무 중 다쳤고, 90%는 휴식 시간 보장과 초과근무 수당 지급을 거부당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소득 불평등이 심화하자, 미국 전역에서는 노동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저임금에 허덕이며 살아가던 캘리포니아 패스트푸드 노동자들도 거리로 이끌어 냈다. 이들은 “감염 위협 속에서도 자리를 지켰지만, 내 삶이 나아지긴커녕 더 팍팍해졌다”고 강변했다. “기업이 이익을 노동자들과 마땅히 나눠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미국 노동자인권옹호단체 ‘15달러를 위한 투쟁’에 따르면, 2020년부터 캘리포니아 패스트푸드 업계 종사자들이 벌인 파업은 450회가 넘는다.
이 같은 목소리는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의회를 향했다. “적어도 생활비만큼은 벌게 해 달라”는 게 이들의 요구였다. 기업들은 돈으로 맞섰다. 주의회에 100만 달러 이상을 쏟아부으며 ‘입법 저지’ 로비를 벌였다. “가장 힘든 시기에 프랜차이즈 가맹점과 고객들의 눈에 포크를 찌르는 것과 마찬가지”(매튜 할러 국제프랜차이즈협회장)라면서 여론몰이에도 열을 올렸다.
주 당국은 패스트푸드 노동자들 주장에 더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2022년 노동절(9월 5일), △패스트푸드 업체들의 최저 시급을 22달러 한도 안에서 올릴 수 있고 △논의 과정에 노동자 대표를 포함시키도록 한 법안에 서명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지난해 9월엔 전국에 60개 이상 점포를 둔 패스트푸드 업체에 한해 ‘올해 4월부터 최저 시급 20달러로 인상’을 골자로 하는 최종 법안에도 서명했다. 최소 50만 명이 직접적인 혜택을 받게 될 것으로 주정부는 전망했다. 뉴섬 주지사는 “더 공정한 임금, 안전하고 건강한 근무 조건, 더 나은 교육을 향한 한 걸음”이라고 자평했다. 법안을 발의한 크리스 홀든 주 하원의원은 “오늘 우리는 이 나라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패스트푸드 임금법 중 하나가 서명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노동자, 소비자만 피해 볼 수도”
패스트푸드 최저 시급 인상은 그러나 ‘저임금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이라는, 목표한 결과만 불러오진 않을 전망이다. 미국 의회예산처는 2021년 보고서에서 “연방 최저 시급을 시간당 15달러로 올리면 수십만 명이 빈곤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동시에 물가 상승, 성장률 둔화, 일자리 140만 개 감소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짚었다.
그간 시급 인상에 격렬히 반대해 온 업체들은 보란 듯이 메뉴 가격 인상을 예고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유명 멕시칸 패스트푸드 체인 ‘치폴레’는 4월 이후 캘리포니아주 매장 메뉴 가격을 5~9% 올릴 예정이다. 햄버거 체인 잭인더박스도 6~8% 인상하기로 했다. 맥도널드도 가격 인상 방침을 세웠다고 한다. 캘리포니아의 패스트푸드 평균 가격은 미국에서 여섯 번째로 비싼 수준인데, 여기서 더 가격을 올리면 패스트푸드를 사 먹는 대신 차라리 집에서 요리하는 걸 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본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