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덩이 적자 미, 자국우선 선회
수십 조 원에 이르는 보조금을 앞세워 반도체 기업을 유치했던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이 잇달아 미온적인 태도로 돌아서면서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판도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투자 이후 최종 제품이 생산되기까지 3~4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데 보조금 지연으로 투자 시기가 밀릴 경우 시장 수급의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중국을 배제한 새로운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위해 추진한 ‘반도체지원법’은 도입 1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보조금을 공식적으로 확정받은 기업이 없다. 미국이 약속한 보조금 총액은 527억달러에 이른다.
이 같은 불확실성 속에서 미국 기업이 최대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우려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당장 미국의 전체 보조금 중 최대 40억달러가 인텔의 군사용 반도체 생산 지원에 투입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자국 기업에 더 많은 지원을 해달라”며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7월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을 만나 “삼성·TSMC 등이 미국에 제조 시설을 짓는다면 분명 좋은 일”이라면서도 “우리(미국 기업)가 더 많은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막대한 보조금을 쏟아부어도 반도체 공급망을 독점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데다 경제위기까지 지속되면서 바이든 정부로서는 ‘외국 기업 퍼주기’라는 비판 여론을 계속 외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매년 셧다운(정부 폐쇄) 위기를 겪을 정도로 미국 정부 재정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우크라이나 등에 퍼부어야 하는 돈이 천문학적으로 불어나고 있다는 점도 변수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반도체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미국 측에 서 대대적 투자 계획을 밝힌 삼성전자·TSMC 등 외국 기업들은 당혹스러운 반응이다. 삼성전자가 향후 10년간 총 2171억 달러의 천문학적 투자 계획을 밝혔고 SK하이닉스는 150억 달러를 들여 어드밴스드 패키징 시설을 짓기로 하고 부지를 물색하고 있다. TSMC는 애리조나에 공장 2곳을 건설하기 위해 400억달러를 투자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보조금 규모에 대한 협상이 생각과 다른 양상으로 펼쳐질 조짐이 보인다”며 “‘자국 우선주의’가 실제 나타나면 보조금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 부담마저 큰 미국 공장은 그 자체로 변수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미국 애리조나주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는 TSMC는 현지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공장 건설이 지연되고 있다. TSMC는 400억달러를 투입해 공장 2개를 짓고 있는데 현장에 투입할 전문 인력을 확보하지 못해 이미 첫 공장 가동 계획은 1년 넘게 미뤄졌다. 삼성전자 또한 1공장 완공을 앞둔 텍사스 테일러 파운드리에서 2공장 건설이 지연될 것이라는 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불확실한 보조금 지급 결정은 미국 내에서도 논란을 촉발하고 있다. 특히 각종 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힘을 잃지 않으면서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우호국 기업들에 대한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러몬도 장관은 2일 레이건국방포럼에서 “수익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짜증이 난 몇몇 (미국) 반도체 기업 CEO들이 있다”면서도 “국가 안보 보호가 단기 매출보다 중요하다”고 꼬집었다.
보조금으로 인한 투자 불확실성의 확산은 유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EU는 430억 유로(약 62조 원)를 투입해 반도체 산업 육성에 뛰어들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자국 내 반도체 생태계 구축을 시도하고 있는 독일은 TSMC와 인텔에 각각 50억 유로, 99억 유로를 보조금으로 제공하겠다며 공장 유치에 성공했다.
하지만 최근 연방법원에서 독일 정부가 예산을 반도체 공장 지원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실제 지원이 이뤄질지 불확실해진 상태다. 독일 정부가 새로 예산을 편성해 지원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지만 의회의 비판 또한 거세 집행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 같은 불확실성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들에 돌아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해외 생산기지 구축 계획이 예상치 못한 변수로 지연되면서 미래 사업 계획 전체가 흔들리며 타격을 입을 수 있어서다.
도원빈 한국무역협회 연구원은 “처음부터 투자 자체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뤄진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기업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투자에서 발을 뺄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문제는 향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 기업이 이를 신뢰하고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겠냐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진동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