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전쟁·강달러 요인, 신흥·빈곤 국가들 타격
미국 달러화가 부족한 신흥국들이 물물 교환 방식으로 해외 무역을 추진하고 나섰다. 두 개의 전쟁과 지속되는 인플레이션, 강 달러의 여파로 달러가 고갈돼 가는 신흥국 경제의 단면이다.
6일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세계 최대 홍차 수출국인 케냐의 은주구나 은둔구 재무부 장관은 이날 나이로비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이집트 대사로부터 달러 대신 이집트산 제품을 지급하고 홍차를 구매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밝혔다. 은둔구 장관은 당시 요청과 관련 “(이집트 대사는) 당장 우리는 홍차 대금으로 지급할 달러가 없기 때문에 홍차를 가져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며 “먼저 홍차를 가져갈테니 케냐 측도 어떤 상품을 가져갈지 정해서 오라고 했다”고 당시 제안을 전했다.
이집트는 지난 3일 신용평가사 피치가 국가 신용등급을 정크등급인 B에서 B-로 하향 조정할 정도로 경제난을 겪고 있다. B-에서 한단계 더 하락할 경우 잠재적 채무불이행 가능성이 있는 등급이 된다. 피치 측은 “이번 등급 강등은 이집트의 대외 자금조달 능력과 거시경제 안정석, 정부 부채 위험의 증가를 반영한다”고 말했다.
이집트의 달러 고갈은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밀 등 식품 가격이 급등한 이후 본격화했다. 이집트는 세계 최대 밀 수입국 중 한 곳으로 기타 여러 식품과 연료 역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팬데믹 기간동안 국가의 주요 자금원이던 관광 산업 폐쇄로 달러 유입은 줄어든 반면, 물품 수입을 위한 달러 지출은 급등하면서 달러 보유고가 급감했다.
특히 지난해 3월 연방준비제도(FRB·연준)을 비롯한 글로벌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올리면서 상황은 악화됐다. 지난해 3월 초 달러당 15이집트 파운드 안팎이던 환율은 현재 30.91파운드로 반토막 났다. 인플레이션으로 수입 물가가 높아진데 더해 강달러로 인해 환손실까지 발생하면서 달러 고갈은 가속화됐다.
이집트로부터 물물 교환 제안을 받은 케냐 역시 사정이 마찬가지다. 케냐산 홍차 최대 수입국인 이집트와 파키스탄이 달러 부족에 시달려 홍차 수입을 줄이면서 케냐도 달러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통신에 따르면 올들어 8월까지 이집트와 파키스탄의 홍차 구매가 각각 23%, 13% 줄었으며 이 여파로 달러 대비 케냐 실링 가치는 올들어 18% 감소했다.
이에 케냐 역시 파키스탄을 대상으로 물물교환 협약을 추진하고 나섰다. 통신은 은둔구 재무부 장관의 발언을 인용해 “윌리엄 루토 케냐 대통령이 파키스탄과 물물교환 계약을 협상하기 위해 농업부 장관을 현지에 파견했다”고 전했다.
달러 고갈 문제는 이집트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세계 신흥국가 전반의 문제로 확대되는 분위기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세계 신흥국과 개발도상국(EMED) 4곳 중 1곳이 여러 이유로 주된 달러 확보처인 국제 채권시장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통신은 현재 이집트와 케냐, 파키스탄은 물론 나이지이라와 아르헨티나, 쿠바, 볼리비아, 스리랑카, 레바논 등의 국가가 달러 부족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국영 에너지 기업인 YPF가 영국의 에너지 기업 BP나 스위스 석유판매회사 군보르(Gunvor)로 부터 수입한 연료의 대금을 지급하지 못해 유조선이 하역을 하지 못하고 바다 위에 떠 있다. 이 여파로 주유소는 문을 닫고 고객들이 주유소 앞에 긴 줄을 서고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통신은 “YPF가 지급하지 못하는 대금은 약 1억5,000만달러”라며 “아르헨티나는 현재 국제 자본에 접근하지 못하며, 유일한 자금원은 국제통화기금(IMF)과 맺는 440억달러 규모의 협정”이라고 말했다.
달러 부족이 심해질 수록 세계 무역에서 달러의 지위를 대체하고자 하는 신흥국들의 움직임은 빨라질 전망이다. 아르헨티나와 이집트는 최근 브라질과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구성된 브릭스(BRICs)에 신규 가입하기도 했다. 브릭스는 지난해 달러를 대체할 공동무역통화 개발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뉴욕=김흥록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