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화되는 식량 위기
러, 수출용 곡물 무기화 가능성에
미 CBT 밀 선물 ‘6.9불’ 오름세,
작황 악화 ‘원당·코코아’ 가격↑
흑해곡물협정 종료와 엘니뇨(적도 부근의 수온이 올라가는 현상)에 따른 작황 악화, 각국의 ‘식량민족주의’ 등으로 식품 인플레이션이 가팔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18일 주요 외신에 따르면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보장해온 흑해곡물협정이 러시아의 통보로 만료되면서 주요 식량 가격이 들썩였다. 시카고상품거래소(CBT)에서 17일 밀 선물 가격은 부셸당 6.9달러에 육박하며 장중 약 4%, 옥수수 가격은 5.21달러로 1.4%, 콩 가격은 13.86달러로 1.1% 올랐다. 다만 이후 차익 실현 매물이 나와 가격은 하락세로 마감했다.
◇곡물협정 중단, 식품 가격 압박=일단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번 곡물협정 종료로 단기간에 식품 물가가 급등하기는 힘들 것으로 내다본다. 현재 북반구가 수확기를 맞아 식량이 부족한 상황이 아니고 러시아가 계속 협정 종료를 위협해온 만큼 관련 내용이 이미 시장 가격에 반영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AFP통신은 “중기적으로 시장에 긴장을 주고 식품 가격을 압박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태가 장기화할수록 세계 1위 해바라기씨유 수출국이자 세계 4위 밀·옥수수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의 수출 길이 좁아지며 결국 식품 가격이 상승 압력을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당장 세계 최대 밀 공급국인 러시아가 밀 수출을 무기화할지가 관건이다. 스위스 장크트갈렌대의 사이먼 이브넷 교수는 “지난해와 올해 수확기에 러시아는 4500만 MT(메트릭 톤)의 밀을 수출하는 세계 최대 밀 수출 국가였다”며 “러시아가 밀 수출을 무기화할지가 밀 가격의 향방을 가를 것”이라고 진단했다. 러시아가 곡물협정 종료에 이어 자국 밀 수출까지 통제한다면 밀 가격이 급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당·코코아 가격 급등=현재 지구촌을 덮친 엘니뇨도 식품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요소다. 설탕 원료인 원당의 주요 생산국인 인도·태국에서 강우량 감소로 원당 선물 가격은 4월 파운드당 27센트에 육박하며 2011년 이후 11년 6개월 만에 최고가를 경신했다. 현재 소폭 내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23센트 후반대에서 거래되고 있다. 초콜릿의 주원료인 코코아의 국제선물가격도 세계 1, 2위 공급국인 코트디부아르·가나의 폭우에 따른 생산량 감소로 6월 말 MT당 2590파운드를 기록하며 46년 만에 최고가를 경신했다. 코코아는 현재도 2560파운드대에서 거래되고 있다.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서 인스턴트커피용으로 주로 생산되는 로부스타 원두 가격 역시 6월 말 역대 최고치를 갈아 치웠다. 남유럽에 섭씨 40도를 훌쩍 넘는 폭염이 발생하면서 올리브 작황이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이자 올리브유 가격도 고공 행진하고 있다. 스페인산 올리브유 가격은 17일 미터톤당 7519.8유로로 사상 최고 수준이다.
◇식량민족주의도 기승=이런 상황에서 주요 농산물 생산 국가들이 작황 악화를 이유로 수출을 통제하는 식량민족주의 정책을 쓰는 것도 식량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요인이다. 현재 세계 최대 쌀 무역국으로 전 세계 공급량의 40%를 담당하는 인도는 수출 금지를 검토하고 있다. 기상이변으로 쌀 생산량이 급감하자 국내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해외로 가는 쌀을 막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민심을 다독이겠다는 정치적 판단도 깔려 있다. 국제 가격 벤치마크인 태국산 쌀 수출 가격은 지난달 말 톤당 518달러로 1년 전보다 24%나 급등했다.
유라시아그룹의 피터 세레티는 “곡물협정 종료로 흑해를 통해 농산물을 수입해온 북아프리카와 동부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엔 추산에 따르면 기후위기·전쟁 등으로 지난해 식량 불안을 겪은 인구는 전 세계 58개국의 2억 5800만 명에 달했는데 식품 가격 상승은 이와 관련한 위험을 더 키울 수 있다. 식품 가격 상승은 물가와의 전쟁 중인 주요국 중앙은행의 셈법을 복잡하게 만들 가능성도 높다. 로보리서치의 스티븐 니컬슨 전략가는 “물가를 낮추기 위해 노력하는 각국 중앙은행들에 또 하나의 불확실성이 추가됐다”고 평가했다.
<이태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