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주재원들 고환율 장기화 비상
“지출을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는데, 수입이 무섭게 줄어서 걱정이 커요.”
1년 반 전 북가주 실리콘밸리로 이사 온 대기업 주재원의 부인 김모(41)씨는 환율 얘기가 나오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초등학생 자녀 둘을 둔 김씨 부부는 한국 돈으로 받는 월급 중 300만 원을 매달 초 달러로 바꿔 생활비에 보탠다. 그런데 1월 초까지만 해도 한화 300만 원은 대략 2,500달러의 가치를 가졌지만, 지금 300만 원으로 손에 쥘 수 있는 미화는 2,000달러가 고작이다. 한국에서 가져오는 돈을 더 늘리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한 김씨는 “환율이 정말로 1,500원까지 가면 빚을 내야 할 판”이라고 푸념했다.
올 초만 해도 1,190원대를 유지하던 원·달러 환율이 1,420원을 웃도는 상황이 장기간 이어지면서, 원화를 달러로 바꿔 쓰는 미국 주재원·유학생 등의 한숨이 깊다. 자금 사정상 매달 원화를 달러로 바꿔야 하는 이들에게, ‘킹달러’ 현상(글로벌 시장에서 미국 달러의 나홀로 강세)은 당장의 생계를 위협하는 공포다. 지금도 이 환율을 버티기 어렵지만,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강달러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고, 환율이 더 오를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반 년 전 한국 기업의 주재원(임기 3년)으로 미국에 온 이모(46)씨는 고환율 탓에 가족들과 생이별을 더 길게 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원래 내년 초엔 배우자가 회사를 그만두고 중학생 자녀와 함께 미국으로 올 계획이었지만, 한국 돈을 달러로 바꾸기보단 가족들이 차라리 한국에서 좀 더 머무는 게 훨씬 경제적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전체 급여 중 월세 4,500달러 등 고정 비용을 빼고 남는 돈으로 생활해야 하는데, 고환율 때문에 생활비가 점점 줄고 있어 외벌이로는 감당이 어렵다”며 “가족 합류 시점을 미루거나 아예 오지 않는 쪽으로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나마 이씨처럼 한국에서 파견된 주재원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대부분 기업이 기본급은 한화로 주지만, 현지 거주비와 수당 등이 포함된 체재비는 미화로 지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여를 전부 원화로만 받는 주재원이나, 비자 규정상 영리 활동이 제한되는 유학생들은 타격이 막대하다. 샌호세의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노모(30)씨는 이동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이달부터 학교를 오갈 때 버스를 이용한다. 미리 모아둔 돈과 가족의 지원으로 학비를 감당하는 그는 “지출을 줄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어 외식, 커피도 완전히 끊었다”고 했다.
미국에서 학업ㆍ취업 기회를 꿈꾸는 개발도상국 유학생에게 킹달러는 아메리칸 드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장벽이다. 특히 모국에서 고소득 직업을 찾기 어려운 인도, 나이지리아 등 출신 학생들에게 강달러 현상은 뼈아프다. 테네시주 밴더빌트대 컴퓨터공학과 진학을 앞둔 인도 학생 제이 배럿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달러 대비 루피화 가치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현실에 대해 “(루피화의) 구매력이 떨어져 수업료뿐 아니라 미국 내 렌트비와 식비 등 모든 비용을 훨씬 더 많이 내야 한다”고 토로했다.
대학원에 입학한 남편과 함께 지난해 시애틀로 온 김모(35)씨도 환율이 1,250원 아래로 떨어질 때까진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한화로) 미리 모아둔 돈이 여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환율이 오르면서 모자랄 가능성이 커졌다”며 “내가 한국에 먼저 돌아가 돈을 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고환율에 신음하는 이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보다 힘든 건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했다. 실리콘밸리 주재원 정모(34)씨는 “여름에 한국에 방문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는데, 급여 전체를 달러로 받는 현지 기업 직원이 ‘요즘은 한국으로 여행 가는 게 이득’이라면서 한국에 간다고 할 때 너무 부러웠다”며 “환율이 더 올라 자녀가 쓰는 돈까지 줄이는 상황이 되지 않기만 바랄 뿐”이라고 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