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켈로부대 대원 출신 저지시티 거주 장운재씨
군번·계급도 없는 비정규군…북한군 부대 위치파악 주임무
한국 국가보훈처장 8240부대 방문 소식듣고 인터뷰 자처
“이북에 있던 가족과 헤어져 홀로 남하한 16세 소년이 먹고 살기 위해 들어간 곳이 켈로(KLO)부대였다.”
뉴저지 저지시티에 살고 있는 장운재(85)씨. 그는 6.25전 당시 대북 침투 작전 등을 수행한 켈로부대의 대원이었다. 켈로부대는 6.25 당시 미군 소속의 한국인 첩보부대이지만, 비정규군이라 계급도 군번도 없이 오랫동안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잊혀진 존재였다.
당시 16세 소년 장씨도 켈로부대에서 생활하며 첩보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전쟁 중이던 1952년 황해도 연백에서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가 홀로 남쪽으로 피신했다. 그렇게 홀로 걸어온 곳이 강화도 인근 용매도였고, 거기서 만난 동향의 형들이 밥을 주는 데가 있다고 해서 따라간 곳이 켈로부대였다”고 말했다.
장씨는 “당시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기 보다는 배고프니 갔다. 그러다 부대에서 심부름도 하면서 먹고 지내게 됐다”며 “이따금씩 연백 쪽으로 첩보 활동을 나갈 때 나도 따라갔다. 주로 북한군 부대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임무였다. 한밤 중에 용매도에서 갯벌을 건너 연백으로 들어갔다. 밤에 움직이니 별을 보면서 방향을 찾았고, 물 때를 못 맞춰서 힘든 상황을 맞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1953년 휴전이 임박하면서 장씨가 있던 부대는 용매도에서 철수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장씨는 강화도에서 우연히 누나를 만나 부대를 떠나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장씨는 인천 부근의 염전에서 일하다 서울로 왔고 정규군에 입대하게 된다. 장씨는 “켈로부대에서 군번이나 계급도 없던 비정규 신분이었다. 그래서 입대를 했다”고 말했다.
제대 후 파독 광부 등을 하다가 1982년 미국으로 온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청과상 등에서 닥치는대로 일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까지도 뉴저지 호보큰에서 캐셔 일을 했다.
장씨는 25일 한국의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버지니아에 있는 미 육군박물관을 찾아 켈로 부대의 참전을 기리는 8240부대 기념비에 헌화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자청했다. 그는 “뭔가 인정이나 보상을 받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한국 정부에서 켈로부대의 공헌을 기린다는 소식에 그저 내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켈로부대는 1949년 미 극동사령부가 한 출신 중심의 자생적 유격부대를 흡수해 만든 부대로 1951년 7월 창설된 미 8240부대에 통합됐다. 이들은 북한 내 첩보와 후방 교란 등을 맡아 맹활약했지만 비정규군에다가 미군 소속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오랫동안 공로를 인정받지 못 했다.
한편 박민식 보훈처장은 27일 워싱턴DC 6.25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건립된 6·25전쟁 전사자 추모의 벽 건립 준공식 참석한다.
<서한서 기자>